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오후 10시가 넘은 느지막한 시간까지 한 카페에서 친구와 노닥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상가 차양막 밑 노면에 빈 박스를 깔고 누워 자는 노숙인. 잎이 무성한 가로수를 지붕 삼아 밑동 보도블록에서 자신의 온몸을 담요로 뒤집어쓰고 한뎃잠을 자려는 노숙인들이 가끔 눈에 띈다. 대부분 흑인과 남미인들이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인명재천(人命在天)이 아니라 인명재차(人命在車)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찻길도로 옆 인도(人道)를 선택한다. 번잡한 곳이 총기류에 안전한 곳이라 그런지, 끊어지지 않는 엔진 소리와 전조등에도 미동없이 잠자고 있다. 잠자지 않을 때는 상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자신을 바라다보는 주변의 시선엔 무심하다. 비가 오지 않는 한 이런 장소를 고집한다. 무명작가의 시가 생각난다.

/비가 내려도 좋다. 날이 개어도 좋다. 없어도 좋다. 있어도 좋다. 죽어도 좋다. 살아도 좋다./

로스앤젤레스의 12월 월평균 기온은 낮 18도, 밤은 7도 정도다. 몸이 안 좋고 한기가 심할 때는 준비한 싸구려 캔맥주를 마시고 버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침이 되면 각 종교단체가 무료로 제공하는 곳에서 커피와 음식을 먹고 마신다. 그걸로 밤새 차가워진 몸과 빈속을 깨우고 햇볕을 따뜻하게 쬘 수 있는 공원 벤치로 간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렇게까지 나락했을까. 왜 일은 안 하고 이런 생활을 할까. 아무리 생활이 흔들려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일하며 공존하는 삶이 보람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길 잃은 들개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문명(文明)이 없는 것 같다. 직장을 구하려 돌아다녀도 거부당하고,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해 일해봐야 따라가지 못해 이내 쫓겨나고 만다. 이들에겐 세상의 무수한 법 테두리는 헛된 것이고, 끝없이 외쳐대는 이야기는 모멸과 괄시이고, 수많은 공약은 공허한 성벽일 뿐이다. 이리하여 주정부가 제공하는 쉘터(Shelter)에서의 관리와 규제도 적응하지 못 해, 길거리에 누워 눈 감고 쉬 흔들리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각해(覺海)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연인이다'는 TV프로그램을 유튜브를 통해 가끔 본다.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집을 짓고, 어두웠던 과거를 자연에서 홀로 치유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이곳 노숙인들은 거리로 내몰려 도심의 거리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통곡하고, 후회와 끝없는 아픈 사연들을 되새김질하며 내일을 위해 버티고 있다.

작금의 세상은 더 많은 부와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는 데 혈안이 된 자본주의적 경쟁사회다. 이곳에서 소외된 대부분의 노숙인들은 남을 헤치지 않는 성격과 인품이다. 이들의 자존심은, 어떤 칠칠치 못한 욕망과 유혹 앞에서 추호도 본심을 그릇되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침묵한다. 애오라지 그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그들이 성장한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틋한 상념뿐이다. 그리곤 가족을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아갈 꿈을 날마다 꾸고 있다. 이리하여 이들은 대문이 없는, 도회지의 상가 차양막 밑 인도가 부와 소유와 권력이 없는 평등한 사회라고, 나는 명단(明斷)한다.

12월의 밤이 깊어간다. 대형빌딩 앞 나뭇가지마다 수많은 깜박이등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상점들의 쇼윈도는 마음껏 동심의 세계로 빨려들게 하고 귀에 익은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백화점 안에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와 별모양 풍선과 나팔 부는 천사와 여러 색의 종들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맥주 캔 서너 개를 구입한다. 그리곤 혼잡하지 않은 상가 부근에 노숙하는 이들에게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과 함께 맥주 캔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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