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대망의 새해가 열렸나 싶더니 금세 첫 달의 중턱을 치고 올라선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어제의 잿빛구름이 아직껏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벽두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현안들에 대해 나름대로 공통된 키워드를 생각해본다. 

우선은 이해(利害)의 문제다. 어디 쉬운 현안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여기엔 객관적 척도가 있을 수 있기에 그나마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다음은 참여의 문제다. 여기서는 절차적 정당성과 관련해 서로의 견해가 대립된다. 한쪽에서는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됐다고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로 이 참여의 문제가 간과(看過)되면 결과가 비록 주민복지로 이어진다 해도 자칫 우민화(愚民化) 정책으로 비난 받을 소지가 있다. 

나머지는 소통의 문제다. 소통은 공감이며 핑퐁이다. 그럼에도 소통을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다. 내가 상대를 이해할 수 있으면 소통이고 아니면 불통이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 누구나 나름대로 판단과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단 밖으로 표출될 때에는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기에 나와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 온 세계 사람을 친구 삼을 수는 없어도 최소한 적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는가(John F. Kennedy). 

한편 집단행동의 경우는 그들의 주장이 정당화되려면 대의성(代議性)이 있어야 한다. 대의성이 취약한 '부분'은 '전체'일 수 없다. 대의성이란 공동체의 의사(전체)를 일정한 그릇(부분)에 담아내는 것이다. 예컨대 의회는 국민 또는 주민의 의사를 수렴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제도적 기관이다. 의원들은 선거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대의성을 부여받게 되며, 선량(選良)이란 칭호를 얻는다. 그 밖에는 주민의 의사를 표출할 방법이 없는가. 여기서 시민운동이 등장한다. 이 운동은 지난 1989년에 설립된 '경제정의실천연합'을 그 효시(嚆矢)로 본다. 이후로 불특정 다수의 주민이나 이해당사자들에 의한 상설 또는 한시적 단체들이 출몰하게 됐는데 오늘날은 난립상을 보인다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시민사회운동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정체성 안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야 한다. 특히 강조돼야 할 것은 반드시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훼손하는 경우까지도 용인되는 사회체제는 없다. 더군다나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자기들의 주장을 기필코 관철해내고야 말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는 가히 혁명적 발상으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집단행동에도 인격적 전략이 요구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쌍방간에 인격과 기본적 인권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특히 상대의 아킬레스건이나 실낱같은 소통의 실마리마저 끊어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순간을 건널 외나무다리는 부수지 말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대치현장에 '활동가'니 '운동가'니 하는 이름이 등장했다. 지역과 집단의 절박한 이슈를 들고 투쟁하는 리얼한 현장에 끼어든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누구들인가. 항간의 얘기처럼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그러한 분위기를 부추기는 이른바 '전문 시위꾼'들이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문제해결에 도움은커녕 저들로 인해 시위는 더 격렬해지고, 주장의 순수성이 희석ㆍ왜곡되거나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들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무쪼록 정당하게 주장하고 정당하게 대응하라. 그러나 이 주장이 정녕 절대 다수의 견해인지, 그리고 목적에 접근할 다른 길은 없는지, 한편 주장을 수용할 수는 없는지, 대응은 적정한지 등은 마지막까지 고심해야 할 자기반문(自己反問)이다. 여론의 진정한 실체는 어디까지나  '침묵하는 다수'이며, 그 시선은 늘 현장을 응시(凝視)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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