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수탈로 고통 받던 때, '여자'이기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주저하지 않았고 거리로 나왔다. 

일제의 총과 칼 앞에서도 주저 않고 싸운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더 두려웠던 것은 어쩌면 역사의 그늘에 갇혀 잊혀져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딸 그리고 '여성'으로서 이 땅에 다시 올 '봄'을 위해 목 놓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제주 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   

△제주여성운동 선구자 고수선 지사
제주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수선(1898~1989) 지사는 1990년 제주 여성 최초로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서울을 유학하며 견문을 넓혔으며 제주 여성 중에는 처음으로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제1대 도민회(도의회)·제3대 민의원(국회의원)에 출마하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낸 것은 물론 제주여성청년회(1925년) 초대회장 등 여성·사회 운동에도 앞장서며 여성 인권 신장을 부르짖었다. 

또 어린이집 운영에 앞장섬으로써 제주보육사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전시켰다.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예총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고 지사가 들어 올린 첫 깃발에 힘 입어 제주 여성들은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기던 의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도전의식을 바탕으로 여성운동이 일어났고 제주에도 여권 신장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해녀항일운동 주역 부춘화·김옥련·부덕량·김계석·고순효
강인한 해녀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된 해녀 항일항쟁은 부춘화(1908~1995)·김옥련(1907~2005)·부덕량(1910~1939)·김계석(1913~?)·고순효(본명 고차동·1915~?) 등 5인이 이끌었다.

해녀 항일항쟁은 제주도사(島司)가 조합장을 맡고 있는 어업조합이 해산물을 빼앗고 각종 세금을 부과하며 착취하는 데 대항해 일어났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제주시 구좌읍·성산읍·우도면 일대에서 1만7000여명이 참여했고 238회의 집회와 시위를 펼쳤다.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에 모인 잠녀 수백명은 "너희들이 총칼로 대항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항한다"며 굳건한 의지를 표명했으며, 5일 뒤인 12일에는 잠녀 1000여명이 세화리 오일장에 모여 제주도사의 차를 가로막고 호미와 창을 휘두르며 일제의 수탈에 저항했다.

이후 수십명의 해녀들이 구속되자 이들 5인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고문에도 자신들이 주모자라고 밝히며 동료들을 석방시키고자 했다.

△여성교육 개척자 최정숙·강평국·김시숙·김진현·이경선
최정숙 지사(1902~1977)는 고수선 지사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유공자 추서를 받았다. 제주시 삼도동 출신인 그는 1907년 제주 최초 여학교인 신성여학교에서 공부했다. 고수선 지사 등에 이어 서울 유학길에 올랐고 서울 진명여고에 이어 경성관립여고보에서 수학하던 중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79명으로 구성된 소녀결사대를 이끌고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됐다.

8개월간의 옥고 생활을 마친 최 지사는 신진교육을 전파하며 '여수원'과 '명신학교'를 설립했고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도전해 극빈환자들의 헌신처인 '정화의원'을 개원, 지역봉사활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모교였던 신성여학교의 무보수 교장을 자처했고, 신성여고의 초대교장을 역임하는 등 제주여성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감이자 제주도 초대 교육감으로 선출된다. 

제주 여성교사 1호 강평국(1900~1933)은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본명인 '연국'(年國)을 '평국'(平國)으로 고쳤다. 그는 '여수원'(女修園)을 열어 도내 여성에 대한 문맹 퇴치와 초등 교육 및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시숙(1880~1933)은 일본 오사카에서 여공보호회·여공노동소비조합을 조직하고 신진회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 운동가다.

여성독립운동가 김진현(1911~2001)은 1929년 전남 광주에서 항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진명·숙명·근화·정신·동덕·배화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대표들과 함께 서울지역 궐기를 도모했다. 이에 김진현 등 학생 대표들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라' 등의 격문과 함께 태극기 100여장을 제작해 1930년 1월15일 봉기,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역시 서울에서 항일학생운동에 참여한 이경선(1914~?)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진학 당시 독서회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했다. 

△ "대한 독립 만세" 부르짖은 여학생·여공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재학하던  제주 출신 고연홍(1903~?)은 독립의 열망을 일깨운 박애순 교사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태극기를 손에 들었다.

이렇게 1919년 3월 10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종교인, 시민 등 1000여명에 의해 '광주 3·1 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줬으며, 시위 대열에 합류해 목을 놓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다 체포됐다.

광주 3·1 운동에 참가해 재판에 회부된 독립운동가 48인의 재판기록은 90년만인 지난 2009년에야 공개됐다. '고연홍(高蓮紅) -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1월'이라는 기록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서귀포 중문 출신의 이갑문(1913~?) 역시 사립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으로서 일제에 저항했다. 1931년 7월 발생한 '만보산 사건'을 구실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대해 격분한 이갑문은 '전조선 혁명적 학생들에게 격 함'이라는 격문을 몰래 학교에 살포했다. 

노동운동을 벌이며 일제의 부당한 탄압에 저항한 현호옥(1913~1986)은 일본에서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자전거 공장 여공으로 일했다. 1933년 2월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의 회원이 된 현호옥은 메이데이 등 각종 노동운동을 통해 일제에 투쟁했다.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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