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녀 문화로 꽃 피우다4-바깥물질의 확장 Ⅲ

'미역 이식 후 채취 위해 해녀 모집'기록…'생계 유지'목적 뚜렷
바다 건너 얻은 '세상 보는 눈' 교육 영향, 재생산·투자 이어져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은 '바다 어장 개척'과 노동 능력 전파로 해석한다.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까지 물질을 갔던 배경에는 '생계 유지'라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과정에 할머니, 어머니로 이어지는 민속지식을 습득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바다 밭에 씨를 뿌린다거나, 배움에 대한 투자가 이뤄졌다는 점은 흥미롭다.


△ 자원·시장 독점에 이용 해석

제주 해녀들은 국내 출가를 시작한지 만 10년 만인 1903년 일본으로 작업 영역을 확대한다. 이어 중국과 러시아까지 반경을 넓혔다.

에구치 야스타카의 '제주도 출가해녀'(1915)를 보면 일본 외에도 중국 산동반도 웨이하이웨이(현 위해시)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칭다오 출가 물질은 흥미롭다. 우도 출신 문덕신이 가공공장 운영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칭다오에 제주 미역을 이식하고 이를 채취하기 위해 제주해녀를 데리고 갔다는 얘기다. 1935년 미역 채취를 위해 구좌읍 종달리와 성산면 고산리, 한경면 용수리, 안덕면 사계리, 표선면 표선리, 우도면에서 상군 해녀 80명을 모집해 5~8월까지 조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해녀들의 평균 수입은 300엔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 봉급은 40엔 수준이었다. 칭다오에는 또 1912년 한천 공장이 설립, 가동하면서 우뭇가사리도 짭짤한 수입원이 됐다. 제주도의 1939년 '제주도세요람'을 보면 당시 제주 해녀들의 출가지에 '칭다오'가 있다.

중국 대련 물질은 전복 채취가 목적이었다. 안덕면 대평리 출신의 김응수가 1937년 안덕면 대평리와 사계리, 한림읍 옹포리 등지에서 해녀 20명을 인솔해 대련에 갔다. 당시 한 어기에 80~100엔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밭 한 마지기에 15엔 정도 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눈 질끈 감고 중국에 다녀오면 밭 두서너 마지기는 사고도 남았다.

러시아 출가 물질은 「제주도」지(1996)와 다구치 다다키의 「제주도의 해녀」(1933), 1933년 '제주도세요람'에 등장한다. 봄 청진까지 물질을 나갔던 해녀들 중에서 다시 다시마 채취가 벌이가 좋다는 정보를 듣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건너갔다는 기록이다.

연구자들 중에는 당시 제주해녀의 국외 물질에 대해 '일본 제국 세력권'을 적용하기도 한다. 일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자원·시장 독점과 이용을 목적으로 한 군사적 지배 정책을 기초로 했다는 해석이다.

당시 해녀들이 그런 목적을 알고 이동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정치적 논리에 이용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 징용물질…'보고 들은'지식 전파

현해탄을 건넌 해녀들.

1세대 재일제주인이자 보소 반도 '마지막'해녀인 홍석랑 할머니와 그 주변 해녀의 삶은 또 다른 접근법을 제시한다.

한경면 금능리 출신의 홍 할머니는 20살이던 1944년 국민 징용령에 의한 '모집'형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후 화약 등의 원료가 되는 감태 채취를 하는 이른바 '징용 물질'을 했다. 이 경우는 일본에 의한 강제 출가로 보는 것이 더 작합하다. 처음 오사카로 들어갔던 홍 할머니는 고향 제주보다는 태평양에 가까운 일본 치바현 보소 반도까지 흘러간다.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홍 할머니가 번 돈으로 제주에 땅이나 집을 샀다는 흔적은 없다. 일본에서도 홍 할머니는 사회제도적 지원을 받고 생활하고 있다. 홍 할머니의 존재 의미는 일본 출가 물질 외에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라는 가치 판단 기준에서 전파한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보소 반도의 아마들은 남성과 여성의 노동 영역이 구분돼 있었다. 자맥질을 해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일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해초를 채취하는 수준이었지만 제주 해녀의 작업 모습을 보고 잠수를 했다는 일본 아마의 증언은 특별하다.

바깥물질이라 구분하기는 했지만 '물질'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해녀들이 태어나 자라며 체화한 '공유된(shared)' 지식들은 학습이란 이름으로 전승됐다. 해녀 공동체 내부에서 전해지던 것들은 할망바다(마라도 향약), 학교바당(성산읍 온평.오조리), 이장바당(조천읍 신흥리) 같은 풍습이나 '풍조(風藻)' 등으로 외부와 공유됐다.

해녀들이 바깥물질을 경제적 이유로만 한정해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또 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분명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반복됐고 그 규모도 커졌다. '힘든 작업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이유 중에는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 

바깥물질을 통해 뭍과 세상을 배운 해녀들을 중심으로 배움의 필요성에 눈을 떴던 것이 주효했다. 적어도 내 자식이나 손자 등은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고 큰물에서 유영하기를 희망했고, 그를 위한 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1932년 국내 최대 여성항일운동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위해 일어섰던 해녀항일운동도 '야학'을 통해 세상을 배웠던 해녀들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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