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연말과 연초에는 각종 단체 모임이 많다. 행사가 시작되면 애국가와 미국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1935년 11월 작곡)는 대부분 1절만 부르는데 가끔 4절까지 부르는 곳이 있다. 이럴 때는 애국가 가사를 영상으로 띄워 준다. 애국가는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가(國歌)로 준용했고, 1941년에는 광복군 결성식에서 불린 것을 계기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적인 국가로 연주되고 공인되었다. 고종황제 시절, 당시 군악대장으로 조선에 와있던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가 1902년에 만든 애국가가 있다.

상뎨(上宰)여 우리나라를 도우쇼서/반만년 오랜 역사 배달민족/영원히 번영 ᄒᆞ야/해달이 무궁하도록/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상뎨여 우리나라를 도우쇼서

(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도우소서/반만년 오랜 역사 배달민족/영원히 번영하여/해와 달이 무궁하도록/성지동방의 원류가 곤곤히/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에케르트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Kimigayo君が代)도 작곡했다. 원곡은 7음 음계 3/4박자인데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자, 1908년부터 지금의 애국가 가사를 찬송가 <찬미가>에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 사인(Auld Lang Syne: 오랜 옛날부터)이다. 5음 음계로 온 백성들이 부르기에 편하고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없어 기미년 3‧1운동 당시 애국가는 이 곡조에 따라 불렸고, 이미 온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지금도 미상(未詳)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이 가사를 보고 작곡했을 터인데, 무슨 이유로 자신의 악보에 작사자를 넣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일설에 의하면 그 당시 민간에 펴져 있는 가사에다 작곡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작사자는 안창호(1878~1965)이거나 윤치호(1865~1945)라 한다. 1955년 7월 28일,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열렸다. 이날 13인이 출석해 투표결과 11대 2로 윤치호가 확정되었으나, 전원일치제라는 확정방법에 따라 결정하지 못했다. 김동길 교수의 칼럼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이 개성에 있는 윤치호 선생을 찾아가 문안드렸다. 헤어질 때 김활란 박사에게 “내가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 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요.”라고 기술되어 있다.

나라 사랑에는 김구 선생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게 뒤지지 않았던 윤치호 선생은 매일 일본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라, 해외에 망명했던 이들과는 입장이 다르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친일파였던 친일파가 아니었던 애국가 작사자를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친일과 반친일로 시시비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국가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녹아 있고 가사 후렴 중 무궁화 꽃은 삼천리 화려강산의 국화(國花)이기 때문이다.

2017년 5월 동유럽을 한 달간 여행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들렀을 때 시민공원에 있는 안익태(1906~1963)의 흉상을 찾았다. 이 흉상은 2009년 9월 안익태 선생의 모교인 이스트음대에서 제막식이 있었으나 3년 후 2012년 5월 이 장소로 옮겨졌다. 안경 낀 그의 흉상과 넉 줄짜리 한국어 연력을 보며 1979년 8월 15일, 독일 켈런성당(Kalner Dom) 소강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이날 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다. 참석한 전원이 일어서서 애국가를 제창할 때다. 그런데 뒷좌석에서 유학생과 재독교민들의 울음 섞인 애국가가 뒤섞여 축축하게 들려왔다.

빗방울이 꽃잎 위에서 톡톡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40년 전 애국가 제창에서의 울음소리처럼 1월의 싸한 바람과 함께 을씨년스럽게 비가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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