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주 제주에코푸드 대표·논설위원

고려시대 제주에서 가장 웅장했던 건물은 무엇일까. 당연 하원동 법화사다. 오래 전 원대의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굴되었다. 앞과 옆면이 각각 5칸과 4칸으로 바닥면적 약 100평 건물이다. 거기에 기단 벽돌이 넓은 2단인 점을 감안하면 2층 건물이다. 법화사는 조선 초 1406년 노비수 280명을 헤아렸다. 육지에서도 보기 드문 당대 최대의 사찰이라 할만하다.

출토된 유구와 유물은 또 어떤가. 용과 봉황이 양각된 암수막새들이 출토되었다. 범상치 않은 유물들이다. 개성의 만월대 왕실과 13세기 원대 황실 유적에서나 발굴되는 희귀품이다. 거기에 '지원육년(1269년)에 중창을 시작해서 지원16년(1279)에 완공했다'는 명문기와가 출토됐다. 지원 6년은 탐라 성주 양호가 대원제국의 수도 대도(북경)에 가서 쿠빌라이 칸(1260~1294)을 알현하고 난 직후다.

그는 북경에서 귀국하자마자 1268년 조천 신촌 지경에서 반대파인 문행노의 무리를 제압했다. 곧 이어 1270년 즈음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명월포로 상륙했다. 송담천(제주교대 주변)에서 고려 관군과 양호가 이끄는 부대가 연합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반적 이문경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후 양호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대원제국의 직할령 되면서 그의 유일한 피붙이 아들 양기는 총관부의 관리가 되었다. 따라서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들어 법화사의 중창을 시작한 중심인물은 바로 성주 양호다.

그는 쿠빌라이 칸으로 부터 바다를 건넌 고을 '제주'라는 명칭을 떼어내고 '탐라'라는 옛 국호를 다시 받아 위상을 바로 세운 입지적 인물이다. 그래서 원사에는 고려-탐라-일본의 순으로 기사가 분리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원사의 탐라 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탐라인이다.

양호가 성주로 재임할 당시 법화사는 지역사찰에서 대원제국의 비보사찰로 전환됐다. 20여년 전 법화사에 장보고 동상을 세웠다. 육지학자에 의한 어거지식 장보고 짝짓기는 법화사의 정체성을 어지럽힌다. 대신에 양호의 동상이 우뚝 서야 탐라역사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닌가.

양호가 서거한 후 법화사는 대원제국의 핵심 사찰로 변모한다. 그 증거가 법당에 봉안되어 예배를 받았던 금동미타삼존여래님의 존재다. 원의 내로라는 예술가 양공이 주조한 바로 그 동불 3구의 삼존불상이다. 농구선수 서장훈 키 207cm 보다 조금 큰 장신 동불이다.

원을 멸하고 명을 창업한 주원장의 아들 주체(영락제)는 돌아간 부모의 영생극락을 위해 1406년 법화사 삼존불상을 강탈해갔다. 삼존불상과 부속 불구를 담은 궤짝이 15개에 달했다. 궤는 판자 1천장, 쇠 600근, 마 700근으로 만들었다. 승려들과 짐꾼들이 무려 수천여명이 동원되어 운반했다. 미루어 보아 불상 규모는 웅장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영락제의 삼존불상 강탈 사건 후 하원의 법화사는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조선정부도 1408년 노비수를 1/10로 축소시켰다. 불상이 없는 사찰은 더 이상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다.

1982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를 통해 법화사의 윤곽이 밝혀졌다. 지금은 복원되어 구품연지를 비롯한 장대한 모습이 한라산을 마주하며 눈앞에 펼쳐진다. 그러나 삼존불상을 잃어버린 법화사는 탐라의 혼이 없다. 우리는 그 동안 매장 문화재에만 눈을 돌렸다. 중국의 하늘 아래 불타 없어지지 않고 어디엔가 있을 삼존불상을 찾는데 소홀했다.

먼저 불상 모형을 그래픽 영상으로 편집하여 헨드폰에 탑재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중국 유학생이나 교민·관광객들에게 제공하여 사찰과 박물관 등 불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자. 확인이 되면 환수활동을 펴야한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가 있다. 강탈해간 문화유산은 그들에겐 전리품이자 골동품일 뿐이다. 고려 말 찬란한 탐라 역사는 법화사에 대한 역사 기억에서 시작된다. 그 기억의 힘이 바로 법화사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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