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아침, 제주국제공항의 항공편 출발을 알리는 전광판에는 "PYONGYANG"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떴다. 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장 멀게 느껴지는 그 곳이 다른 낯익은 지명들과 함께 담담하게 도착지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 반세기 넘도록 굳게 닫혀있던 남과 북을 잇는 하늘길이 조금이나마 열리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53명의 제주도민 방북단을 태운 비행기는 이렇게 휴전선을 바로 질러 평양 순안(順安)비행장으로 향했다.

한시간 반 남짓한 비행 내내 나는 흥분과 설렘으로 범벅이 된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방북단의 일원으로서의 여정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사조차 확인이 안된 외할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나서는 길이기도 했다. 그간 몇 년 동안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서 할아버지의 행방을 밝히느라 노력해왔고, 지난 2월에는 53년 전 할아버지가 북의 고향으로 건너가기 전에 나왔던 저서들이 세월의 묵은 때를 벗고 재출간 되어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터라 떨리는 감회는 한층 더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평양의 모습은 실로 독특한 풍경이었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자본주의의 풍부한 세례를 톡톡히 받으며 자라난 나에게는 "그땐 그랬지" 식의 옛 추억조차 없는 고색창연한 낯선 광경이었다. 또한 대동강을 끼고 발달한 평양은 여러모로 서울과 입지조건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고층빌딩이 즐비한 광복거리는 서울 한복판을 연상시키기도 하였지만, 통행량이 지극히 적어 썰렁한 도로와 너무 단출하여 소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상점 간판들, 무채색의 건물들은 이곳이 도시라기보다는 마치 도시로 꾸며놓은 거대한 영화 세트장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도착하는 날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시작된 5박 6일 동안 나는 의식적으로 "학습"의 자세를 취하려고 노력했다. "말로만 듣던" 곳이 아니라 실은 "말로도 들어보지 못한" 곳에 서있는 것이다. 물론 짜여진 스케줄대로 보고 듣고 느껴야 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곳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결과 내가 얻은 것은 "혼란"이었다. 적지 않은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의 한 사람이기에 창 밖의 풍경들이 어떤 친근감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혼란이었다. 정겹기 그지없는 산(山)과 수(水)에 취해서, 또한 밝은 표정으로 정답게 손 흔들어주는 사람들이 너무도 반가웠던 나머지 몇 번이나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 사이로 눈에 띄는 붉은 구호들과 방문하는 곳이면 으레 "위대한"으로 시작되는 설명, 체제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깔려있는 안내원들과의 대화가 한편으로 낯설고 어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친근감과 낯설음이 빠르게 교차하는 혼란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방북 기간 내내 나는 망설였다.

서해갑문 방문을 마지막으로 일정을 모두 마치고 5월 15일 오후 평양을 떠났다. 혹시나 했던 북의 가족들과의 만남은 결국 정치적 이유를 넘지 못하고 무산되었고 출발할 때의 설렘은 착찹함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정리되지 못한 혼란스러움과 안타까운 심정까지도 모두 한데 어우러져 이번 방북은 값진 경험이었다. 남북이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비록 그 느낌이 거부감이나 혼란스러움이 될지라도 일단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보여주는 구체적인 노력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믿는다.

나의 할아버지가 그토록 염원하던 남과 북이 함께 어울리는 그 날, 자연스러운 왕래가 이루어지고 다시 이곳을 찾게 되는 날에는 오늘의 경험을 흐뭇한 추억으로 회상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마음 속 한구석의 우울함을 떨쳐 버렸다.<김민형·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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