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숙 화가·논설위원

얼마전 일곱 살 난 딸을 둔 엄마와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딸 아이가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한다며 여자의 직업으로 화가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맞장구를 치면서 아이에게 시각체험을 비롯해 오감을 일깨우고 많이 생각하고 호기심을 갖게 해 주면 좋다고 조언도 했다.

몇 달 전에는 미술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진학한 딸을 둔 후배가 작가의 삶은 어떻냐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작가가 되고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선배로서의 조언을 듣고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즈음 들었던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가 얘기 한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제언 10가지’ 중 세개를 인용해 주었다. '2. 작가의 삶은 고되다. 그러므로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꼭 하고 싶을 경우에만 그 길을 택하라' '3. 밤을 꼬박 새울 만큼 치열하게 하고, 동료 작가들과 서로 지지해주라. 혼자서 버티기엔 당신이 굉장히 약한 존재임을 잊지 마라' '4.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이 절대 지루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정말’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써 가면서 심사숙고하기를 강조하는 대목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래의 희망이 몇 십번 바뀔지도 모르고 그림에 막 재미를 붙인 일곱 살 난 아이에게 작가의 삶을 깊이 고려해보라는 건 우습다. 하지만 이미 성년이 되었고 전공을 해서 작가를 꿈꾼다면 한번 곱씹어봐야 할 말 들이다. 작가의 삶이 녹록치 않다는데도 작가가 되려는 이가 많은 걸 보면 이는 절대로 지루하지 않는 삶의 매력 때문일까.

몇 년 전에 작품활동을 하는 한 후배가 얘기하길 “요즘 나작가 너작가라는 말이 있다. 취미로 그림을 배우다가 상업성 짙은 공모전에서 상을 타고 개인전 해서 작가가 된다. 이름하여 자칭 작가, 나작가다. 요즘은 나작가가 너무도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대학입시를 뚫고 치열하게 공모전 준비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에 비해 쉽게 작가가 되는 데 대한 비아냥 섞인 말이면서 타인이 인정해주는 ‘너작가’가 진정한 작가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 때는 나도 맞장구 치며 동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누구나 전시도 하고 출판도 하고 창작의 영역도 다양해졌다. 나에게서 만족하는 ‘나작가’가 되든, 만인에게 영감을 주고 울림을 주는 ‘너작가’가 되든, 너도 작가고 나도 작가고 세상사람 모두가 작가가 되는 것이야말로 생활속의 예술이 구현된 게 아니겠는가! 굳이 나작가니 너작가니 구분없이 작가가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작가 못지않게 작품을 봐 주는 눈이 많다면 금상첨화다. 창의성은 창작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통해서도 나오는 것이다. 좋은 작품들을 많이 보고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하는 감상교육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좋은 작품을 보는 안목도 높아질 것이고, 안목이 높은 사회에서 좋은 작품, 좋은 작가도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는 것을 좋아하든 보는 것을 즐기든 그림을 좋아하다보면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작가가 되고 싶을 때가 오지 않을까. 그때가서 작가를 한다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비장한 각오로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75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삶을 마감하는 101세까지 주변의 평범한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면서 미국의 국민화가가 된 이도 있다. 모지스 할머니라 불리는 안나 매리 로버트슨 모지스는 미술교육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작가라는 자의식이 없이도 그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따뜻함과 위안을 준다. 그렇다면 지금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앞서 언급한 제리 살츠가 한 제언의 첫 번째는 이렇다.

'1. 작가가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자기 생각을 구슬로 꿰어내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예술은 없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