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지금 산을 오르고 있다. 15년 전 시인에게 산은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이었고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통곡과 분노를 벼리던 시인은 이제 산 속의 영지(靈池)에 자신의 마음을 비추며 산 속 깊은 곳,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제주 4·3을 다룬 서사시 ‘한라산’의 시인 이산하가 쓴 「적멸보궁 가는 길」은 시정의 소음도, 산사의 염불 소리도 모두 적멸(寂滅)의 순간에 멈춘, 그 찰나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3대 관음성지인 낙산사 홍련암과 강화도 보문사, 금산 보리암, 그리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적멸보궁을 기행하며 세속에 절은 ‘머리와 고기’를 내던진다.

 비 그친 송광사, 천자암으로 향하는 오솔길에서 시인은 비에 젖은 낙엽과 솔잎이 뿜어내는 향기를 온 몸의 감각으로 느끼며 참선 도량의 지고(至高)함을 보여준다.

 87년 ‘한라산’으로 필화사건을 겪은 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시인은 산사의 고요 속에서 자신의 첫 마음과 동정과 순수를 바치며 행복해한다.

 시인에게 있어 산사기행은 온몸으로 고백해 다음 장을 여는 독서체험이며 몸으로 고백하는 사랑의 행위다.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영월 법흥사, 양산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향하는 시인은 무엇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오히려 자신의 밑바닥 마음까지 들키기 위한 고행의 길이다.

 단순히 절집 내력이나 털어놓고 퇴락한 시정의 속됨을 교시하는 산사기행이 범하기 쉬운 오류를 피해 가는 것은 시인의 섬세한 언어 감각이다.

 지적 사유와 때로는 명상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인의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은 산사기행에 풍부한 질감을 더해준다.

 유려하기까지 한 시인의 산사기행과 함께 산문집의 곳곳에 수줍은 듯 자리잡은 수십 편의 시편들을 읽는 재미도 또한 쏠쏠하다.

 여행의 순간을 포착한, 그러나 그 순간의 감성까지도 함께 묻어나는 시편들은 잘 찍은 여행사진첩으로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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