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문철 전 제주도교육청교육정책국장·논설위원

모든 조직은 지도자와 구성원의 질적 성숙도 여하에 따라 조직의 성향이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는 생산성으로 이어진다. 그 중에도 특히 지도자는 너무나 중요한 영향변인이다. 자질과 능력은 지도자를 평가하는 핵심요소다.

조직은 선출직, 임명직, 추대직을 막론하고 어떻게든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하지만, 대체로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자질과 능력면에서 함량이 모자라는 인물을 세워놓으면, 임기 내내 아니 임기가 끝난 후까지도 심각한 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럴진대 어떻게하면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는가.

물론 법제적인 선거공영관리 메카니즘이나 조직 내의 인사검증 시스템이 있기는 하나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다. 도리없이 유권자들은 편집되고 분장(粉裝)된 피상적 정보에 의존할 따름이다. 그런가 하면 당선된 인사들은 자신은 철저히 검증된 지도자임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긴 하나 문제는 이제부터다.

아기들도 막상 기어다닐 줄만 알게 되면 영락없이 밥상위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미상불 남보다 더 앞서고자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또한 옛말에도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 했듯이, 인간은 자기 이름 석자 남기기를 소망한다. 이렇듯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너나없이 사소한 일에도 나대고 자랑하지 못해 안달일진대 하물며 지도자이랴. 마을 이장만 되어도 내심 마을 어귀에 자신의 공적비를 세우고 싶어 하리라.    

하기야 그런 심성 자체를 놓고 따따부따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반주민과 지도자의 경우는 다르다. 지도자가 그러한 성향이 지나칠 경우, 그로 인해 나타나는 폐해(弊害)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도자가 공명심(功名心)이 강하다보면 조직의 목적 추구에 소홀하거나, 나타난 성과를 사실상 자기의 치적(治績)으로 갈음하기에 더 집착할 개연성이 있다. 이뤄낸 생산성을 놓고 이것이 조직과 지도자 어느 편의 것이냐를 설왕설래하기는 무의미한 논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논란의 저변에 깔려있는 의도를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조직의 성과를 제시할 때 때로 '최초, 최고, 유일' 등의 수식어를 대하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이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전국'이니 '사상'이니 '도내'니 하는 접두어를 달고 나올 때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게 무슨 흠이 되느냐고 반문해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더군다나 이러한 우려에도 부끄럼 없이 떳떳하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하지만 과대포장이나 아전인수 긱 선전으로 인해 실망해 본 기억이 없지는 않은 터이고 보면, 일말의 긴장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국이 아니라 사상 최초라 할지라도 그러한 수사(修辭)에 매몰되기 보다는, 그것이 본질적 목적과 가치에 부합된 성과인지를 냉철하게 평가해 봐야 한다.  

항간에는 '홍보(Public Relations)'를 뜻하는 영문의 이니셜 'PR'의 음가(音價)를 따서 '알릴 것은 알리고 피할 것은 피하라'는 코믹한 표현이 회자되기도 한다. 그렇다. 알릴 것은 제대로 알려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수요자에 대한 지도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대수롭지도 않은 결과나, 결국은 저절로 그렇게 될 일, 아니면 다른 데서도 이뤄낼 것이 예상되는 결과 등을 두고, 그게 마치 우리만의 대단한 성과인 양 떠들어대는 상황은 수요자를 현혹시키는 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기를 선택해준 유권자를 섬기며 헌신하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나타난 성과에 대해서는 자신의 치적이 아니라 조직과 우리 모두의 땀의 소산이라는 겸허한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그러한 지도자라면 스스로가 아니라 주민들이 나서서 그 이름에 영예를 부여하고, 역사는 이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내 이름은 결코 내가 남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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