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일 화북초등학교 교장

배토 작업으로 뿌려 놓은 모래에 묻혀 누렇게 누워 있던 겨울 잔디 속에서 어느새 연두색 물을 먹은 새싹들이 삐죽빼죽 얼굴을 내밀어 인사를 건넨다. 학교 뒷문 양쪽에 늘어선 벚나무들도 분홍 꽃망울들을 아치로 만들어 새 학년의 설렘을 안고 첫걸음 하는 아이들에게 환영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새 학년, 새로운 선생님, 새 친구들과 만나는 기쁨으로 교문을 들어서고 있다.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눈들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반짝거린다. 교문 앞에서 선생님들이 함박웃음으로 손을 올리면 하파이브(High Five)로 답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밝고 예쁘다. 어쩌다 시무룩하거나 못마땅한 표정,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한 번 더 살피고 다가가 말도 걸어본다. 아이들이 보내는 신호와 암시는 선생으로 40년을 살아온 감으로 알아채고 어쩔 수 없는 오지랖으로 눈 여겨 보고 관심을 두게 된다.

얼마 전 한 신문기사에서 신학기에 '머리 아프다', '배 아프다'고 하며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부모와 떨어지는 불안한 마음은 있을 수 있고 들여다보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신호 속에는 우리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머리 아프고 배를 아프게 하는 진짜 이유를 찾아 아무 장애 없이 학교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선생님들의 몫은 매우 크다.

어린 시절, 나는 서울에 사는 하나 밖에 없는 오빠와 시골집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세 명의 언니들 아래로 태어난 막내로,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동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아덜이냐" "무신 애기 나시니?" "아이고 게!"

6살 셋째언니는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의 물음에 수 없이 답했고 태어난 내가 아들이 아닌 섭섭함을 귀로 들으며 대문 앞에 종일 서 있었다고 한다.

나는 동네 남자아이들과 담벼락 기어오르고, 돌담 타고 휙휙 뛰어 다니고, 집 앞 바다에서 집채만 한 파도를 거침없이 타고내리며, 남자로 못 태어난 한이라도 풀 듯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7살을 살았다. 

처음 학교에 입학하는 날, 큰언니가 만들어준 짧은 체크 주름치마 입고 6학년 셋째언니 손을 잡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구럼비낭 우거진 골목을 돌아 부푼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하던 그 모습은 지금도 흑백 사진이 되고 수채화 되어 남아 있다.

언니가 찾아 준 1학년 교실 맨 앞 내 자리 옆에는 벌써 한 남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하얀 스탠칼라에 반짝이 단추 달린 고급스러운 검은 학생복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호기심과 반가움에 고개를 들어 쳐다본 순간, 바알갛게 상기된 양 볼에, 누런 코 두 줄기가 '주루룩' 내려와 입술을 덮고 있는 얼굴과 마주쳤다. 내 눈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내 친구 지애가 똘똘하고 귀엽게 생긴 동글동글한 남자아이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지애에게 가서 "비키라" 하고는 그 예쁘게 생긴 남자 아이 옆에 당당히 앉았다. 

지애가 일러바쳤겠지. 키가 큰 긴 단발머리 여선생님이 긴 대막대기를 들고 나를 향해 오셨다. 그 두려움을 모르던, 세상 무서운 게 없던, 마음대로였던 아이의 어깨 위에 '찰싹!', '찰싹!' 매가 떨어졌다.

54년 지난 지금도 그 어깨에 내렸던 찌릿찌릿한 아픔이 그대로 느껴져 온다. 다음 날부터 학교 안가기 전쟁이 시작되었다. 언니만 먼저 집을 나섰다고 "학교 안가!", 신발이 안 보인다고 "학교 안가!" "학교 안가!"…

늘 세 언니들에게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치 않으시던 엄한 아버지는 천방지축 막내에게는 사랑이었는지 방임이었는지 매 한 번 들지 않으셨는데 드디어 그 날 부지깽이를 드셨다.

시골이었지만 남다른 어머니의 교육열은 언니 둘을 제주시내 대학교, 고등학교로 보냈고, 그 언니들의 적극적 회유로 나 역시 초등학교 5학년에 시내로 입성을 하였다. 70여명의 커다란 아이들이 교실 뒷벽까지 틈 없이 바글바글한 교실에 첫 발을 내딛은 나는 아이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대한 부끄러움, 새로운 학교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웨이브 단발머리에 코와 입술사이에 검은 점이 볼록하게 나 있는 여선생님이 밝게 웃으시며 나에게 다가왔고, 가운데 줄 맨 앞자리로 내 자리를 정해 주셨다. 선생님은 가끔 질문에 대한 답을 나에게 시켰고 내가 맞는 답을 했을 때는 폭풍 같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시골에서 올라 온 꾀죄죄하고 촌스러운 이 아이에게 종종 심부름도 시켜주시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당시 그 많은 학생들 중 선생님이 믿고 심부름을 시켜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깨 으쓱한 일이었는지…

친절이 몸에 배이신 분이셨는지 의도적인 배려에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선생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될 내 미래를 미리 보셨는지(?) 선생님 덕에 나는 시골 촌뜨기 부끄럼장이에서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으로 어깨를 쫙 펴고 다니는 아이가 되었고 새 학교 생활에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그 당시 가장 핫(Hot)했던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을 보고 오셔서는 생생하게 이야기로 들려주셨고 우리는 눈앞에 스크린을 보듯 빠져 들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살아 계시다면 80~90대의 동화 속 인자한 할머니처럼 되어 계시겠지만 선생님은 늘 닮고 싶고 그리운 분이다.

봄비가 3월의 멋진 출발을 축하하며 촉촉이 내린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설렘을 헤아려 주고, 새 발걸음을 격려해 주고, 불안은 날려 보내는 마법사가 되기 위하여, 편견 없이 밝은 웃음으로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분주하다. 부디 아이들의 첫 시작의 기억이 '찰싹찰싹' 어깨에 내린 아픔으로 기억되는 일은 없게 되기를, 까만 점이 매력적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랑 부자 선생님을 기억하게 하는 시작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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