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형님댁에 들렀다. 어머니가 썼던 방에서 묵기로 했다. 매년 한국을 방문해 며칠 동안 어머니와 함께 잠자며 밀려 있던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방이다. 그랬던 어머니가 지난달 초순 94세 나이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광안리해수욕장에 갔다. 파도가 흰 그네를 타고 백사장 위로 뛰어오른다. 아득한 수평선과 한없이 너른 바다 그 위 광안대교에는 차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거닐던 곳과 긴 모래톱을 찾았다. 형님이 사는 아파트 앞이 광안리해수욕장이라어머니는 햇볕이 나고 따뜻할 때는 운동 삼아 이곳을 자주 산책했다.

작년 봄이다. 어머니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에게 자신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날 어머니의 모습만 촬영했지, 어머니와 함께하는 촬영을 남들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가끔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큰형이나 형수가 어머니는 항상 "괜찮다"라고 했고 나는 그말을 굳게 믿었다. 다만 듣는 기능이 약해져서 큰소리로 통화해야 가능했다. 흔히 노인에게 찾아오는 청력기능이 약해진 탓이려니 생각만 했다.

형수에게 사진이 담겨 있는 오래된 와이셔츠 두 상자를 받았다. 한 상자는 가족사진, 또 다른 상자는 나에 관한 사진이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생활하는 둘째인 나를 항상 보고 싶어했다.

그 해결방법으로 어릴 때부터의 나의 사진, 졸업앨범 등을 어머니 방에 그대로 뒀다. 사진 속에 사기그림쟁반이 들어 있다. 형수가 어머니의 방을 정리하면서 이 쟁반을 사진 속에 넣어뒀다고 한다.

이 사기쟁반은 2013년 초 직접 구워 어머니께 선물했던 것이다. 쟁반 위에 법문(法問)을 쓰고 어릴 때의 외갓집을 생각하며 초가 위로 매화를 그려넣고, 집 안에는 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이다.

일본의 전통 기모노와 한복 입고 촬영한 어린 어머니의 사진이 나온다. 아버지와 일본에서 결혼하고, 해방되자 외가 가족과 아버지의 두 사촌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일본은 패망하고 정치적인 혼란기였는데 어머니의 결단으로 한국 고향을 선택했다고 한다.

만약 일본에 오래 생활했다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유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설립되기 전인데도, 재일교포들을 찾아다니며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만들기 위해 밤마다 조를 짜서 설쳐댔다고 한다.

부모님은 부산 영도에 정착하고 기와집을 구입했다. 1층은 온돌방, 다락방은 다다미가 깔렸다. 머리에 인 물동이를 큰 물독에 부어 넣는 어머니.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계신 1960년대 어머님의 얼굴이 해맑기도 하다.

아버지는 막걸릿잔을 들고 변소 앞에서 무엇이 좋아 저리 웃고 계실까. 바닷가에서 발가벗고 뛰어노는 우리 형제자매의 철부지 얼굴은 까까머리와 단발머리 학생에서 성인으로 변해 있고, 지금은 다들 손자·손녀를 두고 있다.

이렇게 지나간 세월을 빛바랜 사진에서 한 편의 인생의 드라마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만사개유정 부생공자망(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세상만사 모두 운명이 정해져 있으나 허공에 뜬 인생은 헤매기만 하구나'라는 뜻이다.

난고(蘭皐) 김병연(1807~1863)이 살았던 영월의 집 사당에 걸려 있는 시구다. 난고는 20살 때 영월도면 백일장 사건으로 22세부터 어머니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삿갓 쓰고 조선 팔도를 떠돌다 전남 화순에서 객사한다. 몇 년 후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영월, 마음의 고향에 묻어 준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고 결국 한 평 안 되는 무덤 속에 눕는 것이다. 이런 게 인생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평생 기도했던 믿음의 세계, 시끄러운 세상사 잊고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계실 것이다.

저승에서도 술 좋아하실 아버지와 사랑과 미움, 동과 정, 물과 얼음으로 대립해가며 아버지와 함께 이승에 있는 자식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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