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 대표·제주과학문화공간별곶대표·논설위원

이상한 판단을 할 때가 있다. 잘할 수도 있고 명예도 되는 일을 애써 사양하는가 하면 잘할 수도 없고 민폐만 끼치는 일을 덜컥 받아들이기도 한다. 최근 연달아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내 판단력에 의심을 품게 됐다.

육지의 한 일간지에서 칼럼 연재 제의가 왔다. 본지를 포함해 다른 온라인 매체에도 이미 쓰고 있는게 있었지만 욕심이 나기는 했다. 게다가 존경하는 과학기자 선배가 추천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미 받아놓은 글빚들이 만기를 넘겨도 한참 넘긴 상태라는 것이 문제였다. 더 미루지 못하고 올해는 반드시 내야만 하는 책들이 있는데 체력과 지력과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기존 칼럼을 포함해 하나씩 손을 놓으려던 타이밍이었다. 오고 가는 핑퐁과 여러 곡절 끝에 새 칼럼은 없던 일이 됐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으련만 필진 개편에 실린 엄청난 라인업을 보자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저 제안을 받았어야 하는데, 이들과 칼럼동기가 됐어야 하는데, 별별 어리석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 생각이 어지러웠다. 결정 과정을 지켜보셨던 멘토 한 분이 조용히 타일렀다.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으니까요. 그때는 그게 최선의 판단이었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또 옵니다"

반면 암만 생각해도 내가 잘할 수 없고 시간을 끌수록 민폐가 되는 일은 덥석 받아 몇 달째 곤욕을 치르고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SF 창작이다. 친정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시모프 키드' '삼국지 키드'로 자라나, 언젠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그 글의 장르가 픽션은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겪었던 일을 잘쓸 수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작업은 아는 걸 재배치하는 글쓰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미 스무살 무렵에 내 길이 아니란 걸 깨닫고 고이 접어두었던 페이지를 왜 굳이 펼쳤나 말이다.

처음 SF 단편집에 이름을 싣기로 한 건 우연히 시작한 북클럽 때문이었다. 지난해 이맘 때쯤 문을 연 서울 삼청동 과학책방갈다 오프닝 파티에서 한국SF협회 박상준 회장을 만났다. "우리도 갈다에서 뭐 하나 해야죠?" "그래야죠. 뭐 할까요?" "모여서 페미니즘 SF 읽을까요?" 그렇게 시작된 '페미숲SF갈다'는 여러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시즌 1을 마무리했다.

우리 북클럽 멤버이고 작가이며 천하의 '일잘러'인 윤여경 한국SF협회 부회장이 같은 멤버 이루카 작가와 최지영 에디토리얼 대표, 외부의 다른 작가들까지 꾸려 일을 키운 것이었다. 한 번도 뭔가를 써본 일이 없는 내가 이미 작가인 사람들과 앤솔로지를 엮는 것 자체가 양쪽 모두에게 모험이었다. 몇 달을 질질 끌며 한 줄도 쓰지 못하다가 마감 직전에야 시놉시스에 불과한 글을 던지고 끙끙 앓았다. 역부족이었다.

후의와 애정이 가득한 피드백을 받고도 또 한 달을 질질 끌다 엊그제 초고를 보냈다. 다른 작가들은 완고를 보내고 본문 디자인에 들어간 국면이었다. 출판사가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마저 100퍼센트를 초과달성한 이상 이 책은 4월이면 세상에 나온다.

오직 3월 말 완고를 써서 내 존재가 더 큰 민폐가 안되도록만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창피함을 무릅쓰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 "지루해서 읽다 던졌어. 무슨 설명이 그렇게 많냐" "여캐가 잘난 척해서 비호감이야" 이쯤 되는 독설엔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이미 나는 누구의 평가에도 다치지 않고 돌파하고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막상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니 알게 된 것은 내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가득했다는 사실이었다. 평등한 세상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벗들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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