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전 동국대교수겸 학장

서북(西北)청년하면 관서지방을 떠올린다. 국토를 크게 나눌 때 북부, 중부, 남부가 된다. 북부는 다시 관서, 관북으로 세분됨으로 관서와 서북의 경우 등식이다.

그런 까닭에 관서(關西)지방은 2차적인 분류이면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을 왕래하는 통로(通路)역할'을 해왔다. 서구종교가 중국을 거쳐 파급해올 무렵 정주와 선천이 전도(傳道)거점으로 역할해온 것도 이런데 연유한다. 

중요한 것은 전파경로(route)를 따라 선진문명까지 동반해온 점이다. 개화(開化)기에 명문으로 알려진 오산(五山)학교가 정주에 자리하고 조만식 등 당대를 앞서온 선구자들이 모여든 것도
이런데 연유한다.

그래서 한때에는 이곳이 평양보다 선진화된 곳으로 알려졌고 교육을 받으려는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이곳 출신들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기질과 선진화교육의 합작(合作)으로 각 분야를 선도(先導)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광복 이후에 출범한 이승만정부도 서북출신이 주도해온 정치집단이었다. 원거리에 놓인 제주도와 관련시킬 때 서귀포관내에 '경성제대(서울대전신)생약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중앙문화를 도입하는 전환점이 됐다.

이때에 책임자로 들어온 석주명도, 서북 출신이면서 선진(先進)문화를 전파해온 주인공이다. 약초재배도 유별하지만 정(井)자형(grid pattern)토지구획을 도입함으로써 자연발생형태가 압도한 제주도에 혁신적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다 75만의 나비표본을 확보하는 한편 844종의 나비를 분류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방언(方言)에도 심취해 '제주도자료집'까지 출간했다.

엄청난 업적이면서 현대화과정에서 제주도에 신학문을 보급한 선구자(pioneer)가 됐다.

한국동란 때에는 서북출신이며, 오산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이 피난길에 올랐고 발자취를 남김으로써 서귀포에는 '이중섭미술관'까지 설립하게 됐다.
 

이 화백의 대표작인 황소 그림도 제주도에서 만난 인연(因緣)의 결과물이다. 현재 35억원에 이를 만큼 고가(高價)미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제주도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이런 희대(稀代)작품이 완성됐겠는가. 여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런 긍정적 모습과는 달리 4·3사건을 기해서 제주도에 들어온 서북청년들의 경우 부정적 흔적을 남겼다.

그들이 응원경찰로 파견될 당시 제주도는 좌우 대립으로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체제를 탈출해온 이들 처지에서 좌익(左翼)을 불순세력으로 단정하고 제주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됐다.

거기에다 언어는 불통 상태이고 풍속마저 이질(異質)감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오해를 증폭시키면서 결국은 무고한 주민희생으로 이어지게 했다.

당시 제주도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준(建準)위가 발족했고 마을 이장도 생소한 위원장(委員長)호칭을 붙이고 있었다.

이것이 북한체제를 경험한 서북청년들에게 이념적 오해를 불러왔고 이장(里長)들을 숙청대상으로 여기면서 극한상황을 낳게 했다.

한편 모르쇠로 일관하는 제주도민의 아이롱(我耳聾)주의도 오해를 증폭시켜왔다.

여기에다 도지사와 주요기관장까지 서북출신들이 독점해왔고 이를 배경으로 서북청년들은 정복(征服)자처럼 행세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현지여성들과 결혼으로 이어졌다. 좋게 말하면 원거리에 놓인 제주도와의 문화교류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역 간 충돌모습이다.

현시점에서 바라보면 한때를 휩쓸고 간 광풍(狂風)처럼 상처를 남긴 역사시대의 재앙(災殃)으로 남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결의를 다지는 일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긍정(positive)과 부정(negative)이 뒤엉키는 세상이치'를 되새기며 굳건한 각오로서 분발할 때인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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