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병찬 서예가 시인·논설위원

샛노란 유채꽃 향기 속에 새 봄의 여왕인 왕벚꽃이 막 피어나려고 잔뜩 물이 올라 있었던 화사한 봄날의 일요일이었다. 지난달 24일 제주시 아라동주민들이 마련한 한라산신제는 산천단에서 내외 귀빈들과 김천에서 내려오신 이약동 목사의 후손들이 참석해 전통 유교방식으로 성대히 봉행됐다.

한라산신은 탐라국과 탐라 백성의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도민안녕을 지켜주는 신이며 전염병에서 건강을 지켜주는 치병의 신이며, 3재인 풍재(風災)·수재(水災)·한재(旱災)를 막아주는 신이며, 풍우를 조절해 태풍과 장마를 막아주고, 축산 번영과 농사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란다. 

이 한라산신을 모시고 도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한라산신제 현장에서는 현경하 봉행위원장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현저히 눈에 띄었는데 그 발걸음마다 무사안녕의 다짐이 굳건히 다져지는 듯 했으며, 행사장 주변에는 아라동 주민과 제주도 관계자들이 참석해 제례를 지켜보며 올해 무사 안녕, 소원 성취 등을 기원했다.

탐라국 시대부터 시작된 한라산신제는 고려 후기인 1253년(고종 40년)에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제례로 발전했다는데 제주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기가 2월이어서 기상이 악화되면 도민들의 고통이 매우 컸으며, 심할 때는 얼어 죽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기 때문에, 1470년 당시 제주목사 이약동은 도민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 이곳 산천단에 제단을 마련해 산신제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매해 음력 2월 첫 정일(上丁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게 됐다고 하니 여기에서도 청백리 이약동 목사의 선정을 베풂이 지금에 사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감명 깊게 하는 정치 행정가의 모습인 것 같아 그가 후손들에게 남긴 훈계의 시 한 수가 그려진다.

"살림이 가난해 나누어줄 것은 없고(家貧無物得支分)
있는 것은 오직 낡은 표주박과 질그릇일세(惟有簞瓢老瓦盆)
주옥이 상자에 가득해도 곧 없어질 수 있으니(珠玉滿籯隨手散)
후손에게 청백하기를 당부하는 것만 못하네(不如淸白付兒孫)"

이약동은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만년에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손들에게 위와 같은 훈계의 시를 지어 남겼으니 오늘 이 산신제 현장에 참석한 김천 후손들의 마음마다에는 그 자랑스러움이 매우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약동 목사는 떠날 때 쓰던 물건을 모두 놔두고 떠났다고 한다. 그가 쓰던 말채찍은 오랫동안 관덕정에 내걸려 청백리의 상징으로 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라산신제는 매우 오랜 역사의 제주 고유 문화자산임을 되짚어 보고 이를 도민 문화행사로 키워 탐라역사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기회로 활용하도록 해 도민이 참여하는 축제문화로 키워나가자는 이야기도 자자하다.

김순택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살아 있는 신화의 섬으로 거듭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선이 백록 타고 노닐던 영산이요(仙人駕鹿是靈巒)
모두가 신의 자취이니 공 들일 제단이라(神跡皆成效勞壇)
천지님이 오랜 세월 아껴 감춘 보물 땅(地隱千年天秘寶)
궁편도 했지만 도탑게 생업을 의지한 곳(窮偏衆業附生敦)
지금은 교통이 편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만(今空海便來還任)
옛날에는 이 경관을 꿈에서나 그렸겠나(昔取夢中想景觀)
외로이 바다남쪽을 지키는 산 잘 보전하고(獨立鎭南須守護)
나라제사 전통 이어 국태민안을 기원하세(傳行國祭祈和安)"

이 사람도 한라산신제 행사장에서 좋은 글 써주기에 임했는데 도민들이 신청하는 글귀 중에는 "흘러라"와 같은 참신한 글감을 선정해 써가는 분도 있어 흐뭇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라산신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문화축제이면서 전통제례 의식이라는 인식을 갖고 오늘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로 도민들 모두 화합의 자리가 되기를 염원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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