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미주지회 회장·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화장실에서 이빨을 닦다가 거울을 본다. 나이 때문이겠지만 얼굴에 생긴 자잘한 주름은 말할 것도 없고 양쪽 귀 주변에 새벽 서리가 앉은 듯한 흰 머리카락이 유독 신경 쓰인다. 염모제를 찾았다.

거의 사용하지 않은 KW회사 염모제가 눈에 띈다. 이 제품은 남다른 사연이 있다. 흰 머리카락이 많은 집사람은 북제주군으로 집을 옮긴 후 피곤한지 처음으로 미용실 대신 나에게 염색을 부탁했다. 약국에 갔다. 약사는 직접 국내 특허 염모 제품을 소개했다. 13가지 식물추출물이 함유하고 옻타지 않는 제품이고 5분이면 된다는 KW회사제품을 추천했다.

염모제를 들고 응접실로 갔다. 집사람을 의자에 앉히고 염색하는 장면이 보이도록 이동식 긴 거울을 옮겨다 놓았다. 두 손에 장갑을 끼고 염모제 크림과 산화제 크림을 1:1비율로 섞어 곽에 들어있는 전용빗으로 집사람의 머리칼에 조심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염색약을 혼합하면 흰빛에서 점차 검게 변하는데 이 염모제는 섞자마자 새카맣게 변했다. 염색약을 다 바른 후 10여 분이 지나자 머리를 감았으나, 염색하기 전 그대로였다. 무슨 이런 염모제가 있나 싶어 사용하던 것을 들고 급하게 약국에 갔다.

약사는 이 제품은 혼합하지 않고 각각의 제품을 별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품 중 한 개를 단독으로 머리칼에 사용하고 제품이 마르면 그 위로 다른 제품을 발라야 한다고 한다. 좁쌀만한 설명서를 읽지 않았던 실수가 있었지만 새로운 염모제를 소개할 때는 상세한 설명을 해야 했다. 기분이 엉망이 됐고 은근히 부아가 났다.

염모제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이 있다. 재작년 4월이다. 한 문우 집에서 여름호 문집을 편집하고 있었다. 집주인인 A문우는 나의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많이 보인다면서 염색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방문한 친구와 같이 사용했던 염모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흰 머리카락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귀찮기도 하고 더군다나 문우의 부인도 있기에 사양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B문우가 자신은 염색하겠다며 거들었다.

A문우는 일하고 있는 나에게 움직이지 말라며 칫솔로 흰색크림을 머리칼에 바르기 시작했다. 친절하게 눈썹에까지 발라 줬다. 싸구려 염모제인가 오래된 화장실에서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가 심했고 도대체 염모제가 마르지 않으면서 색도 흰색 그대로였고 따갑기까지 했다. 이상하다 싶어 포장지를 읽었더니 염모제 크림과 산화제 크림을 혼합해야 하는 것을 이 문우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또 다른 크림을 찾아내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모발 염색을 끝낸 세 문우는 함께 주변에 있는 공원에 갔다. 분수(噴水)가 물기둥을 하늘 높이 뜀박질하고 4월의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공원을 걷는다. 희끗희끗 눈에 띄던 세 문우의 머리칼은 태양 아래서 검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B문우는 세상에 검은 꽃이 없는 이유가, 머리에 핀 흰 꽃을 기쁨과 즐거움의 오색꽃을 피우기 위함이라 한다.

그랬을까. 세 사람의 어깨는 당당함과 기품까지 서려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없는 호랑이를 세 사람이면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파마까지 하면 20년은 더 젊어질 거라며 킬킬댄다.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세 사내처럼 억세고 호탕한 기세로 천리마를 몰고 있다. 마치 북만주 초원을 기마로 내닫던 고구려인의 기상은 바람을 뚫고 달리는 흑마(黑馬)의 갈기,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불굴의 기개가 우리의 머리카락 속에 있는 듯싶다.

양쪽 귀 주변을 염색했다. 푸석했던 머릿결은 검게 변해 있다. 검은색은 비밀의 색이라 싶다. 얼굴을 훔치며 거울을 통해 다시 본다. 그런데 거울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나의 얼굴이 낯설게 오버랩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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