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21세기한국연구소 소장·정치평론가·논설위원

나경원 대표는 일본 자위대 행사에 참석했었고 친일재산환수법에 반대하는 등 한국 국회의원 가운데 친일행적이 유난히 눈에 띈다.

나 의원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설립한 홍신재단을 이어받아 경영했다. 전국 29개 역사학회와 단체는 나경원 대표의 친일행각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이번 주에는 나 의원의 사무실에서 대학생들이 농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나 의원은 결국 국론 분열을 시켰다는 혐의로 반민특위를 비판했다. 필자는 '반민특위'를 방해했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국론분열을 조장했다고 본다.

나 의원은 다시 해명을 내놨는데 '반민특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반문특위에 대한 비판이였다'라고 수정 발언을 했다.

나 대표는 분명히 해방 이후의 반민특위활동이라고 이야기했다. 반문특위는 문재인 정부의 등장 전후, 길어봤자 최근 5년 이내의 기간일 뿐이다.

해방 이후라고 정확하게 말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반민특위와 반문특위도 구분 못하는 그런 국민들이 아니다.

우리는 친일파 인사들에 대해서 공정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공정한 시각에서 보았을 때 친일파 인사들을 반드시 처벌해야 했다.

한국의 노론(老論)계 인사들은 일제 때는 친일파로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투사'로 자신들의 전투태세를 정비했다.

친(親)이승만 대통령계의 '반공투사'가운데서도 그들은 이 대통령계의 무력동원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것은 국내에서 진보파계의 인사, 중간파의 인사, 광북군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계 인사, 친일파 인사와 초기 경찰계 무력 도입부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만계와 김구계 인사들이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결국 이승만계가 승리했다.

이승만계는 친일파 세력과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는 북한에 거주하다가 서울 또는 남한으로 진출한 서북청년단파였다.

 이들은 친일파였던 초기 경찰의 협력을 얻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훨씬 일찍 처벌했어야 했다. 최근에 한국 예수교 세력 가운데 폭력을 썼던 세력들에 관한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서북청년단 세력 가운데 친예수교 세력이 일부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이후 시대가 아무리 '유격전'의 시대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노선이었다.

서북청년단은 그들 개인 또는 집단적인 '분노'와 곧 대통령이 될 인사의 갈망을 섞었다. 서북청년단은 한국의 곳곳에 '분노'와 '직접 처벌'의 위력을 발휘했다.

친일파 인사들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들이 서북청년단에 의지했다. 한국의 적지 않은 정치세력들이 이들의 보호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 인사들과 8·15 이후의 폭력조직은 공식적 재판대에서 처벌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이들의 반민족적 범죄와 그들의 폭력행위는 훨씬 약화됐을 것이다.

만약 서북청년단을 강력한 '폭력조직'으로 생각했다면, 제주의 4·3항쟁도 당연히 심하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의 아버지도 공식적으로 처벌되어, 지금처럼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서북청년단'과 나경원의 아버지는 당연히 극우세력이다.

이들은 그들의 폭력에 호소했고 아울러 이들은 돈을 이승만계에게 바쳤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 그들은 일제 때의 친일교육 혐의로 처벌됐을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그같은 불법행위로 처벌받아야 했다. 반면에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철저히 보호했다.

한국에도 좌우 세력을 공히 인정했던 중도세력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당시의 한국에는 좌우익 세력이 공히 살아남지 못했다. 합법적인 한국의 우익도 쓰러졌다. 극우세력만이 살아남았다.

지금도 나경원은 친일세력이라는 의혹을 심하게 받고 있다. 그들이 친일세력으로서의 힘 발휘를 자제했다면 한국의 힘 관계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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