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보전육성위원·논설위원·시인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니까 이제 인문학의 시대라고 한다. 아시다시피 인문학의 구성요소는 문학과 역사, 철학이다. 왜냐. 문학엔 사실의 길과 진실의 길이 있다. 사실의 길은 현실이다. 현실은 구체적인 현상이므로 현실 대응에 착오가 생기는 것을 실수나 실패라고 하는데 이 때 뉘우치는 과정이 가공의 진실이다. 

역사는 광범위로 국가나 민족에게 있지만 개개인에도 삶의 이력이 있으므로 인생 자체가 역사다.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헌신적으로 본받을 만한 이정표인가 하는 물음에서 깨우치는 과정이 인생의 가치를 쌓는 탑이 되는 거다. 

더해 철학은 삶의 정도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는 선험적인 깨달음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당위성이 곧 철학이기도 하다. 간추리면 '삶도 허무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라는 유유자작으로 인생이란 '뉘우치고 깨우치면서 깨닫는 것'이라는 결론을 구한다. 

시인인 필자는  뉘우치는 과정을 위해 사실의 길과 진실의 길을 찾는다. 능력이 한계가 당연하므로 상상의 영역을 되도록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명시를 접하고는 감동을 먹고 본 받기도 한다.

올라갈 때 못 보던 꽃을 내려올 때 보았다는 시구가 한 때 회자됐지만 올라갈 때 본 꽃을 내려올 때 다는 곳으로 내려오느라고 못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오래 보면 예쁘다는 꽃도 있다는데 꽃은 엉겅퀴 꽃도 예쁠 수밖에. 꽃이 피는 이유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리해 어느 시인은 '꽃은, 핀다'고 쉼표 하나로 압축했다. 여기서 쉼표는 세상 여자들이 남자를 맞이할 때 고민했다는 그 아름다운 갈등이다. 이 엄동설한에 피어야 할 건지, 이 험한 산비탈에 어찌 할 것인지 갈등하다가 그래도 꽃은 피어야만 꽃이기에 핀다는 거다. 꽃 피고 새들이 우짖는 호시절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수필집 제목에 반하고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라는 시집 제목에도 감동을 받고는 반드시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집행유예를 유추한다든가 '빗줄기는 물방울의 탑'이라는 발견도 구했다.

비는 멀리서 날아오는 물로 된 화살이다. 땅에 꽂히면 부러지게 돼 있다. 빗줄기도 땅에 떨어지면 물방울이 탑을 이뤘다가 사방으로 튄다. 어제 죽은 사람에게 오늘이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라거나 세월이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는 묘사에 덩달아 시심이 일렁거려 '외딴섬은 갈매기 한 마리만 날아도 풍경이 된다'거나 '아내의 섬'이라는 제목으로 망망대해에 섬이 없다면 나의 물새 어디서 사느냐는 시도 썼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선이 직선에 불과해 신의 선은 곡선이라고 논리적인 비약에 이르기도 한다. 지구가 둥근 사실로 수평선이 곡선이다. 그래서 모든 열매가 펑퍼짐하든 길쭉하든 다들 둥글다. 열매가 둥근 이유는 햇살을 골고루 받기 위함이요, 빗물이 오래 고이면 곤란하므로 썩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떨어져도 덜 부서져야 한다는 배려 덕분이다.

그래서 나이 들어 죽는다는 것은 다만 멀리 간다는 공간개념에 이르러 멀리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유명시인의 깨달음에 또 다른 감동의 물결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말이 왜 생겼으며 슬픔이라는 말뜻이 무엇이냐고 곰곰이 따져보기도 한다. 기쁨과 슬픔을 저울에 달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우냐는 질문에 다들 슬픔이 무거울 거라고 했다. 기쁨은 기를 뿜어내는 상승이고 슬픔은 쓸쓸하고 싶음이 줄어든 외로움이니까 그러하다.

사삼사건 때, 해변 마을로 피난가면서 집에 사람이 없다고 정낭 세 개로 가로 막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잠시 동네잔치 집에 갔다는 표시로 정낭 하나만 걸쳤는데 영영 사라진 마을에 없어진 집도 있다. 한라산 눈밭에 떨어지는 동백꽃은 세세연년 새봄을 낳기 위한 진통이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