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주 걸스로봇·제주과학문화공간 별곶 대표
영국에서 3주를 보내고 돌아왔다. 큰아이의 고교 입시 때문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제주신화월드 호텔 그룹에 새로 부임한 지배인과 미팅을 했다. 랜딩 호텔과 메리어트 호텔, 서머셋 리조트까지 세 곳을 관리하는 어려운 자리다. 생각보다 너무 젊어 결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물었다. 서른하나라고 했다. 세계적인 호텔 그룹인 싱가포르 리조트월드 센토사에서 근무하다 14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온 신동협 지배인 이야기다.
신 지배인은 부탄과 인도에서 영국계 기숙학교를 나와 말레이시아 버자야 대학 호텔경영학과에서 수학하고 싱가포르 퀸 매거릿 대학에서 호텔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호텔관광학계에 있는 아버지가 일찌감치 BRICS(2000년대 초 주목받기 시작한 신흥경제대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 2010년도에 추가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문 앞글자를 땄다.) 시대를 내다보고 아들을 이들 국가로 내보냈다고 한다. 남다른 선견지명에 깜짝 놀랐다.
엊그제에는 '더 핀란드'라는 레스토랑 겸 문화공간 하나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핀란드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는 언니 가족에 이어 주인장 김지은 씨도 '문화이민'을 한다는 거다. 제주에서 핀란드 문화와 요리를 다채롭게 선보인 데 이어 아예 본격적으로 핀란드에 한국 문화와 요리를 소개하는 레스토랑을 낸다고 한다. 마땅히 크게 축하해야 할 일이다. 허나, 문화나 과학이나 도긴개긴의 불모지 제주에서 서로 의지하며 함께 시지프스의 돌을 굴려왔던 처지라 아쉬움이 컸다.
클로징 파티에는 제주에서 문화운동깨나 한다는 이들이 가득 모였다. '씨위드'라는 월드와이드 미술 잡지를 내는 팀의 소속 작가 출판 기념회부터 음악회와 캐리커쳐 이벤트에 다국적 케이터링까지 참으로 대단들 했다. 그들 중 절반은 제주에서 태어나 서울은 물론 일본, 미국, 유럽을 돌다 다시 제주로 돌아온 이들이었다. 또 나머지 절반은 육지에서 나고 자랐지만 제주에 터를 잡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외로워서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기댔다. 먼 사촌보다도 나은 가까운 이웃들이 다시 또 바다를 건너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글로벌 노마드라는 말이 달리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와 아이들 생각을 했다. 굴러온 돌이면서 또한 애매하게 박힌 돌 같기도 한 우리들을 말이다. 8년 전, 우리 가족은 오직 제주국제학교 하나만 보고 뿌리를 옮긴 '교육이주자'들이었다. 바다 하나를 건너선지 이민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들 걱정했다. 그래도 비슷하게 '뜬 돌' 같은 이들 덕분에 아주 외롭지는 않았다. 그러다 '효리네 민박"이 입시 성공사례들이,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생겼다. 이제는 다들 부럽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제주에 와서 이제 막 유학을 떠나는 큰아들과 돌일 때 내려와 형처럼 초등학교 1학년을 보내는 둘째에게는 제주가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제주국제학교가 모교고 그곳의 친구들이 동문이다. 큰아들은 영국의 프렙스쿨에 가라는 조언에도 여기 남아 요행히 좋은 성과를 냈다. 이튼 칼리지와 윈체스터 칼리지, 해로우 스쿨 3대 명문 기숙학교에 모두 합격해 이튼에 진학하기로 했다. 입시학원 하나 제대로 없는 곳에서 아이를 전적으로 믿고 끌어주신 선생님들 덕분이다.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처음을 만들고 지금까지 이어온 전정환 센터장은 말했다. 제주국제학교의 아이들이 연어처럼 돌아올 때쯤, 제주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못지 않은 글로벌 허브가 될 거라고. 떠나간 이들이 신 지배인처럼 돌아올지 아닐지 아직 모른다. 그의 아버지처럼 내 마음이 기쁠지 아닐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돌아와도 금세 다시 떠나지 않을 곳으로 만들고픈 소망은 있다. 한 때의 교육 이주자였던 나는 '교육관광'이라는 키워드를 가만 만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