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령리 마을 안길을 걷는데 선인장 군락이 길과 집 안팎을 둘러싸고 마치 보초를 서고 있는 듯하다. 무명천 할머니 삶터에 들러 향을 피워 잠시 묵상을 하고 마당에서 나와 앉았다. 마당 어귀 수도 가에는 녹이 슨 뚜껑이 덮인 큰 항아리 하나, 그 앞에 작은 항아리 하나, 금이 간 빨단 대야, 양은세숫대야, 검은 대야 위에 또 빨간 대야가 엎어져 있다. 먼지 낀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항아리와 대야들이 할머니의 작은 살림이 어찌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총상을 입은 턱에 친친 감은 무명천을 남의 눈을 피해 대야에 물을 받아 빨았을 것이다. 밤이면 달님이 대야에 비친 무명천 할머니의 턱을 비추었을 것이다. 깊은 한숨이 물그림자에 파문을 그렸을 것이다. 

선인장은 줄기가 되는 마디, 즉 손바닥 하나에 2~5개씩 가시가 돋아 있다. 여름이면 이 줄기가 되는 윗부분 가장자리에서 꽃이 피어날 것이다. 줄기와 마디 경계에 상처가 가시로 돋고, 그 자리에 꽃이 피는 것이다. 선인장들이 담 위에 일렬종대로 서 있다. 성벽 위에 올라간 소년병들을 연상케 한다. 온몸에 돋은 가시는 역사가 그들에게 내린 형벌이다. 죽창을 든 손에도, 어깨에 인 돌 위에도 열꽃은 피어나고 옆구리에 뻘건 멍울들이 살고자 했던 몸부림을 증언하고 있다. 어린 시절 겪은 트라우마는 평생을 간다고 하는데 그 모진 세월을 가슴에 담은 이들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노래가 아니고선 그들을 위로하지 못하리. 

함민복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담장을 보았다.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화분이 있고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건배하는 순간인가눈물이 메말라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꽃철책이 시들고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함민복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집집마다 개들이 짖는다. 개들의 울음소리는 어떤 은유다. 경계를 늦출 수 없다는 울부짖음. 선인장만으로는 모자라 개들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들이 짖는 마을에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좁은 골목을 따라 새로 짓고 있는 집 안에서 뚝딱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사람은 없고 소리만 있는 마을, 월령리. 
서북계절풍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이곳 월령리라고 한다. 바람의 원령인 곳이다. 그래서인지 월령리 마을의 옛 지명은 '가문질'이라 불렸다고 한다. '숲이 울창하여 검게 보이는 길'이라는 뜻이다. 마을 주변에 쌓여 있는 검은 돌무더기, 멀리 보이는 바다의 푸른 결기가 이를 증명한다. 앞바람 뒤바람의 경계에서 선인장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퍼시 애들론 감독의 영화 '바그다드 카페'(1897)는 사막에 핀 선인장 꽃을 연상케 하는 영화다. 캘리포니아의 사막 한가운데서 남편에게 버림받은 로젠하임 출신의 야스민 (마리안 제게브레히트 분)이 모텔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바그다드 카페'는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초라한 곳이다. 커피머신은 고장난지 오래고, 먼지만 쌓여가고 있다. 사막을 지나치는 트럭 운전사만이 간혹 들를 뿐이다. 카페 주인 브렌다(C.C.H. 파운더)는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쫓아내고 울고 있다. 인생이 모래사막처럼 강퍅하고 허망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에게 버림받은 야스민이 찾아온 것이다. 

야스민은 커다란 캐리어 하나를 끌며 울고 있는 브렌다 앞에 섰다. "모델이 어디에요?"로 시작된 그들의 대화, 바그다드 카페에 묵게 된 야스민에게 브렌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짐은 직접 가져가세요."라고 화답한다. 그렇게 시작한 그들의 불편한 동거는 뜻밖의 반전을 경험한다. 야스민의 등장으로 카페는 깔끔해지고, 피아노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이 살아나고, 카페는 생명력을 되찾는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마술쇼를 통해 카페를 찾은 손님들에게 웃음을 선물한다. 마술쇼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의 메시지는 이렇다. "오늘을 사는 거예요"라고.

영화는 말한다.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보다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재미있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삶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사막에 꽃을 피우는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바람의 길목을 지키는 방법도 그것이라는 것을 선인장 꽃이 온몸으로 말해주듯이 말이다. 달과 그림자의 경계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시인이 말하기 전에 이미 모든 생명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듯 깨달음은 늘 뒷북을 치면서 다가온다. 이 우둔함을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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