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수 제주관광대학교 기획부총장·논설위원

얼마 전 서울에서 택시를 타게 됐다. 마침 오랜만에 지나게 된 거리를 보며 "많이 변했네"라고 중얼거리자 택시기사 양반이 "지금 어디 사세요"하는 것이었다. "아, 제주도에 살아요" 라고 했더니 뜻밖에 "참 좋은데 사시는군요"라고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또 "제주도! 공기 좋지요, 조용하지요,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서울은 아니에요"라고 했다. 필자는 "예, 예" 하며 듣기만 했는데 속으로는 "내가 진짜 좋은 곳에 살고 있는 건가"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 
살기 좋은 곳이란 삶의 가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뜨거운 더위라는 지정학적 열악성과 싸우며 살아가는 무슬림들에게는 석유자원과 함께 이슬람교라는 신앙적 정서가 있어 중동 땅이 살기 좋은 곳이고 국민소득은 낮지만 행복지수가 높다고 여기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부탄인들에게는 불교 정토와도 같은 자신들의 땅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일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 선생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살만한 곳을 고를 때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얻을 경제적 이익 즉 생리(生利)가 있어야 하며 또 그 고장의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리는 좋아도 생산되는 이익이 모자라면 안 되고 생산되는 이익이 좋을지라도 지리가 좋지 않아도 안 된다. 지리도 좋고 생산되는 이익이 풍부할지라도 그 지방의 인심이 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즐길만한 산천이 없으면 정서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제주도를 이 기준에 의해 본다면 지리적인 조건과 경제적인 상황으로는 살만한 곳으로 부족하다. 그러나 '고장의 인심과 아름다운 산수'를 고려한다면 꽤나 살만한 곳으로 여겨진다. 
또 제주가 그간 살만한 곳으로 여겨진 이유는 제주인들의 공동체적인 집합주의와 자발적인 협력사회 경향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먹을 것이 제한되고 생산력의 한계가 있는 사회, 자연에 대한 의존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사회, 서로 돕고 인정하지 않으면 모두 힘들어지는 사회를 경험한 옛 제주인들이기에 강한 생존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서로 힘을 합하고 나누는 DNA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청담선생께서 오늘날의 디지털 혁명 시대와 안전불감증 시대를 예견하고 택리지를 썼다면 안전(安全)이 보장되는 곳을 추가하지 않았을까.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폭동, 쿠데타와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국내에서도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와 기후 악화, 폭력·범죄와 정신질환에 의한 범행, 스마트폰 등에 의한 디지털치매 우려 등이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는 한라산에서 뿜어 나오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거주 인구와 관광객의 증가에 따른 각종 사고로부터 안전하다고 인정받은 국제안전도시, 농축수산물과 지역 생산 식품이 우수하고 안전한 청정지역, 스마트시티와 전기차가 달리는 교통안전과 디지털 안전도시, 몇 명의 학생으로도 모든 것이 운영되는 안전한 학교 교육, 지속 가능을 고려한 최소한의 개발과 합리적 보존이 공존하는 안전행정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제주를 살기 좋은 곳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짜 안전한가. 우리는 지속가능한 안전을 위해 얼마나 스스로 노력하
고 있나. 안전한 삶은 바로 우리가 먼저 변화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환경의 엔트로피 증가를 걱정하는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는 "생태(ecology)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집(oikos)에 관한 이야기(logos)입니다. 기술만이 아니라 인간의 변화에서 해결책을 찾도록 요구합니다"라고 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제주, 참 안전하고 깨끗한 생태환경에 사시는군요"라고 불리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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