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구약성서에 지혜를 언급하는 부분이 꽤 있다. 어느 종교의 경전에서도 나올 법한 공통된 내용도 많다. 현대의 지혜에 대한 개념과는 달리, 고대 세계에서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이 용어가 활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재능과 기술이 종종 지혜라고 표현되었다. 거룩한 공간을 제작할 수 있는 기능, 성막이나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장인들을 지혜 있는 일꾼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지식과 정보를 지혜로 지칭하기도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전략가와 책사들도 지혜자로 불리웠다. 부도덕한 일을 돕기 위하여 계책을 꾸미는 사람, 혹은 상대를 속일 목적으로 함정을 파는 이들도 기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들의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한명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꾀돌이들이, 유대 역사에도 비일비재 하였다. 

하지만, 지혜의 본령은 살리는 데 있다. 지혜로운 말에 귀를 기울이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당장에는 나 혹은 우리가 사는 방법이 나온다. 더 나아가서 이웃과 세계를 살리는 혹은 함께 살 수 있는 도리를 찾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타고난 품성이 슬기로운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인재들은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를 연마한다.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하여 좋은 선택과 판단으로 모두를 살리는 길을 찾는 것이다. 지혜에도 왕도가 없다.      

공간적인 면에서 삶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호기심을 갖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살피고 낯선 문화를 맛보는 여행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 급격히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여행으로 낯선 지역에서 견문을 넓히는 일들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최근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난 참사 같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경계를 넘고 남들보다 더 특이한 경험을 누리기를 원하는 욕구는 상승한다. 금지된 분쟁지역을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의 축을 따라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이나 영상에서는 타입 슬립이라는 환상적인 경험을 꿈꾸기도 한다. 시간의 장벽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특이하다는 점은 기억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그리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의 연원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역사학의 출발점이 된다. 선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과 기록을 더듬어 그 줄기를 파악한다면, 꽤 유용한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이를 바탕 삼아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다른 의견을 들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길에 선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삶의 지혜가 된다. 사막 혹은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얼른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풍습이 있다. 적대감을 품고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호의를 먼저 베풀고, 서로 안심하고 공존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저들을 두려워하고 배제한다면, 숙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늘 잠재하기에, 이를 미리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낯선 이들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오랜 세월 고립된 상태에서, 안정된 삶을 누려온 탓일 게다. 더구나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동일한 가치관을 견지하도록 강요된 측면도 이에 가세하였다.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가운데 살고 활동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을 배제하며 억압하고 있다.    

어쩌다 예멘에서 온 친구들이 제주사회의 관심이 초점이 되었다. 이제 일 년이 지났다. 국가도 지방정부도 미숙한 상태에서 이를 처리하느라 어려움을 경험했다. 제주의 시민사회와 종교계도 찬반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지혜를 얻고 성숙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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