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이처럼 환한 적막을 가진 이름이 또 있을까. 문 밖만 나서도 보이고, 마음만 먹으면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나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게 바다다. 잊은 척 외면해 있다가도 친구를 불러내듯 바다를 찾게 된다. 

늘 가까이 있는 존재는 사랑의 대상이기 보다는 원망 혹은 무례함의 대상이기 쉽다. 부모가 그렇고, 형제가 그렇고, 친구가 그렇다. 바다는 내가 아무 때고 문 열고 들어가서는 대자로 뻗어서 "물 달라.", "밥 달라." 큰 소리 펑펑 치게 된다. 내 무례함의 극치를 드러내도 아무소리 않고 들어주는 품 넒은 어릴 적 친구와 같다고 할까. 

20여년을 신촌리에 살았다. 집에서 1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바닷가가 있고, 그곳에 '닮머르'라는 바위가 있다. '닭의 벼슬'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와 '닭머르'를 찾았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딱히 뭘 해야 할 지 몰라서 하릴없이 배회한 격이다. 모든 게 막막하기만 한 시절이다.

아침 조회 시간에 늘 하시는 교장 선생님 말씀처럼 "한라산의 정기를 받은 여러분이 이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청소년 시절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지만, 나는 이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렸을 때 그나마 읽은 위인전의 영향이기도 하다. 에디슨, 헬렌켈러, 슈바이처, 퀴리부인...세종대왕.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본받고 따라갈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타고난 천재였거나, 천성이 선하거나 부자였고,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었고,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가난하고, 무능하고, 책도 없고, 선생님은 무서웠다.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닭머르'에 앉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그냥 좋았다. 그러면서도 아득하기만 했다. 아무리 내다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썰물이 지면 보일까 해서 다시 가 보아도 바다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꿈을 갖고 싶으나 꿈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바다는 아무리 물어봐도 묵묵부답으로 응수했다. 내 꿈의 한계를 지어버린 듯한 수평선이 그렇게 애석할 수 없었다. 

해 저물녘에 가서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하늘엔 별들이 총총 떠오르기 시작한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나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리곤 하였다. 까무룩 별들이 바다 창에 내리는 나날들이었다. 

겨우내 윗목에 누워 뒤척이던 고향바다봄은 그 머리맡으로 양은대야를 끌어당기며어젯밤 잠 설친 돌섬 젖은 이마를 만지고 있다. 입춘 무렵 뜸자결에 안개꽃, 봄눈이 와서포물선 물마루 끝이 하늘자락에 허물어지면아득히 옥돔어장엔 등을 켜는 풍란 한 촉. 아직도 가슴에 맺힌 흉터 하나를 어쩌지 못해세월의 뒤켠에 서서 떠난 자를 그리워하던섬기슭 토종동백도 눈시울을 붉힌다 바다가 홑이불 펴고 남녘창을 열어둔 까닭돌아오라 사람아 저 치잣빛 수로를 저어위미리 낮은 방파제 초록등도 켜리라. 고정국,「내 고향 봄바다엔」 전문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완도로 가는 배를 탔다. 완도에서 내려, 순천, 진주를 거쳐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는가.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연명하다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바다를 건너, 바다로 돌아왔다. "길은 항시(恒時) 어데나 있고, 길은 아무데도"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제주 바다에는 등대 두개가 반짝였다. 파란 별 하나, 빨간 별 하나.  

그저 아득하고 막막하게 보였던 바다가 어머니의 손등처럼 따뜻했다. 빨간 등대, 초록 등대 쉬지도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반짝이는 모습은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바다 둘레를 돌며 피어난 무꽃이 마치 집 나간 아이를 기다리는 어머니 모습이었다. 그렇게 바다는 집 나간 나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에 바다 둘레를 걸으며 옛 생각에 젖어본다. 하루가 촉촉하고 가뿐하다. 가끔 사춘기여도 괜찮을 듯싶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다시 마음 감옥 안에 생각의 집을 지으면서 착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다시는 수평선을 못 넘을 것 같지만 기어코 넘는 날도 있으리라. 그때까지 제발 착실해져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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