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를 때마다 숫자를 세는 습관이 있다. 47, 98, 63…,108, 이번에 오른 계단의 수는 108개였다. 유수암리 절산을 오를 때 세어본 계단의 숫자다. 마을에서 이 곳을 찾은 이들에게 수행하는 기분을 느껴보라며 108개의 계단을 만든 듯싶다. 숫자를 세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될 것이다. 마음은 이 곳에 머무를 수 있으니. 

절산에 올라 잠시 땀을 식힌 후 서둘러 내려왔다. 오늘은 마을 안팎을 두루두루 살피고 싶었다. 평화로가 생기면서 늘 스치고 지나가던 마을이라 빚진 마음도 더러 있었으리라. '금덕', '거문덕이', '유수암리', 이름도 여럿인 마을. 이름이 여럿이라는 건 사연이 많다는 얘기다. 

사방에 팽나무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팽나무. 가는 곳마다 쉴 곳이 있어 참 좋다. 어려서는 팽나무 있는 곳을 지나는 게 두려웠다. 지금은 팽나무 아래 앉아 있는 이가 있으면 말을 걸게 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 천연덕스러운 인사말이 나온다. "이 마을 오래 사셔수과", "시집 완 이때꺼졍", "어디서 시집 오십디가", "장전"…,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인사를 하는데, 50~60여년의 세월을 함께 산듯 정겨움과 헤어지기 섭섭함이 있다. 

마을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려면 경로당을 찾으면 된다. 주말인데도 대여섯 분이 앉아 계셨다. 옥수수를 쪄서 먹고 일어서려던 차에 내가 들어왔다며 뭐 하러 온 사람인지 찬찬히 살핀다. '놀러 다닌다'라고 말하려다 '공부 하러 다닌다'로 고쳐 말했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질문을 해보라는 눈치다. "쏠(아래아)이 어디 셔서"로 시작해 "다 죽어부런"으로 끝나는 대화. 삶이 죽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구나 싶다. 어르신 한 분은 4·3 때 겪은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난 그 때 한을 풀고 싶어. 어떵 경 다 죽여불 수 이서", 70여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차마 그 일은 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세살 때 겪은 일인데도 기억이 생생하단다.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너무 충격적인 일은 몸에 각인되게 마련이니까. 유수암리도 4·3 때 피해가 만만찮다. 열일곱 집이 한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어르신이 일러준 대로 동카름으로 향한다. 동카름엔 4·3 때 잃어버린 마을 '범미왓'이 있다. '동문'이라고 적힌 표지석에 앞에 서서 글을 천천히 읽는다. 이곳은 '양태모(아래아)를'이라고 불렀던 마을의 작은 동산이다. "소개되어 산산이 흩어졌고 마을은 소개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물은 마르고 잡초도 무성하여 끝내 페허의 땅이 되고 말았다." 글은 진중한 슬픔이 묻어 있다. 다시는 그 어떤 불운도 막아야한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아니면 어제의 시간을 다 비워버린 대통함일지도. 

화살도 싫고 창도 싫다 마디마디 밥 한 그릇 품기까지 수 천 년을 비워왔다 합죽선도 싫고 죽부인도 싫다 모든 열매들에게 물어봐라 지가 세상의 허기를 어루만지는 밥이라고 으스대리니, 이제 더는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 땔감도 못되는 빈 몸뚱어리가 밥그릇이 되었다 층층 밥솥이 되었다 칼집처럼 식식대는 사람아 내가 네 밥이다 농담도 건네며 아궁이처럼 큰 숨 들이마셔라 불길을 재우고 뜸들일 줄 알면 스스로 밥이 된 것이다 하늘 끝 푸른 굴뚝까지 칸칸의 방고래마다 밥솥을 걸고 품바, 품바, 품바 푸르게 타오르는 통 큰 대나무들 (이정록 시, 「대통밥」 전문)

마을의 불타버린 흔적은 대나무 숲이 말해준다. 유수암리에는 팽나무만큼이나 대나무 숲이 많다. 대나무 숲 안에는 무덤이 있고, 무덤가에 삘끼꽃이 허옇다. 주변에는 새 집들이 들어서 마을도 세대가 바뀌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범의 꼬리 끝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범미왓. 4·3사건 당시 7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1948년 11월 16일 새벽에 토벌대가 동카름에 들이닥쳐 총을 쏘더니 집들을 방화하기 시작했다. 방화를 하고 난 토벌대는 돌아갈 때도 총을 세 번 쏜 후 광령리로 향했다고 한다. 총소리에 놀라 피신한 마을 사람들은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범미왓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잃어버린 마을을 생각할 때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움과 사람을 잃어버린 땅을 설움을 생각하게 된다. 폐허가 된 마을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불경소리가 들린다. 근처에 절이 있는 모양이다. 밭가에 심어진 옥수수 잎 들이 불경소리에 고개를 조아린다. 길 양쪽으로 대나무 숲이 보초를 서고 있고, 새들이 밭두렁과 비닐하우스를 넘나들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어쩌면 불경소리를 주워 대나무 숲에 전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꺼번에 불타버린 땅의 영혼들이 불경소리를 들으며 새 기운을 얻길 바라는 마음이다. 불길을 재우고 뜸 들이는 시간이 오랜 땅들이 우뚝우뚝 일어서길 바란다. 땅이 살아야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살아야 땅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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