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함을 불평하지 않고,편안하지 못함을 걱정한다(不患貧而 患不安). ”

 논어의 계씨(季氏)편에 나오는 말이다.계씨 즉 계손은 공자의 나라인 노(魯)의 대부다.그는 노나라의 영토를 네 개로 나눠 반을 차치하고서도 노의 보호아래 있는 전유를 토벌하여 자기 수중에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계씨의 가신인 염유와 계로가 도의적 가책을 느껴 스승인 공자를 찾아 의논했다.공자가 그들을 질책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불안함을 걱정한다고 했다.화목하면 부족하여도 불평이 없고,편안하면 나라가 기울 염려가 없다.정치가 공평하면 내외의 인민이 복종한다.먼곳 백성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화와 도덕을 베풀어 모여들게 해야 한다.민심이 이탈되고 나라가 쪼게지는데도 이를 막고 지키지 못하면서,도리어 한나라 안에서 무기를 동원하여 동포를 칠 계책을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

 공자의 질책은 시공을 초월,반세기 넘게 대치해온 남과 북의 현실로 이어진다.같은 얼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경국의 지세를 넘나들어 온 한반도 한민족.무력을 앞세운 북진통일,적화통일의 남과 북의 구호가 난무했음이 노나라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을 뿐, 이들 구호들은 춘추전국시대 계씨와 그의 가신의 생각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닐 터.

 살벌한 구호가 슬며시 평화란 이름으로 바뀌기는 최근의 일이다.국민의 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이른바 '햇볕정책'도 그 중의 하나다.얼어 붙은 가슴을 향한 대북 햇볕정책은 최근 '베를린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김대중대통령이 독일방문중 '정부차원에서 북한 경제난을 적극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베를린 4대선언이 그것이다. 비록 '북의 요청이 있으면'이란 단서가 딸려 있기는 하나 오히려 그것이 있어 기대가 크다.일방적이 아니라 상대의 의향을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선언이 '내외 인민'이 따르는 선정인가는 더 두고 볼일이다.하지만 작금 인민들의 편안치 못한 북의 사정에 비춰 메아리가 없지만은 않을 듯 하다.

 사회주의 체제속에 주민들이 아사직전에 몰려 있는 북,그리고 그동안 이를 방관해오다 시피한 남과 북의 대부들.베를린 선언은 그동안 역사와 민족앞에 공동의 범죄를 저질러온 남과 북의 대부들을 자유스럽게 해주는 메시지라고 해서 지나친 기대일까.<고홍철·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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