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 문학평론가 / 수필가 / 논설위원

타호시티((Tahoe City)의 한 캠프장에 짐을 풀고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산책로에서 바라본 호수는 청잣빛 조롱박에 떠놓은 호숫물 같다. 햇살은 침엽수 숲을 비집고 들어와 긴 선을 만들고 내 어깨 위에도 내려앉는다. 신선의 도포자락이 가벼운 윤무를 하듯 신비스럽다. 깨끗한 숲에서 감도는 기운, 정적인 평화로움은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혜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물소리가 정겹다. 동중동하는 회색왜가리가 한쪽 날개를 펴더니 날개 속에 한 다리를 넣고 외다리로 선다. 그리곤 다시 긴 목은 물가로 향한다. 나도 한 다리를 들고 흉내 내어 본다. 

대형 산간 호수, 레이크타호(Lake Tahoe)는 해발 1,900미터에 있고, 넓이는 광주광역시 정도의 크기로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를 경계하고 있다. 

안내판에 쓰인 타호(Tahoe)는 인디언어로 '큰물'이라는 뜻이며, '순도 99.5%의 청정호수'라고 쓰여 있다. 심수층가 아닌데도 고산지대 산정호숫물이 순도가 거의 100%라니 놀랍다. 이는 호수를 둘러싼 고봉(高峰)들에 쌓인 겨울눈과 빗물이 주변의 습지와 분지가 필터작용을 하며 호수로 천천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선착장이 있는 제프코브(Zehyr Cove)에 갔다. 먼저 호숫가 모래사장에 섰다. 두 손을 모으고 한가득 담아 입속에 넣어본다. 담백한 맛이다. 유람선 타호퀸(Tahoe Queen)에 승선했다. 특이한 것은 붉게 페인팅 된 대형 수차(水車:paddle wheeler)가 회전하며 유람선을 움직이고 있다. 미시시피강을 남북으로 오르내리던 옛날 영화를 보는 듯한 멋과 낭만이 들게 한다. 두둥실 배가 떠나간다.

선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느작거리는 호숫물은 햇빛을 받아 무지개가 일렁이고 있다. 배 선상에서 360도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숲에 둘러싸여 있는 한 폭의 대형 동양화다. 푸른 하늘은 호수 위에 내려와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박두진의 '하늘'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중략)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유람선은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에메랄드베이(Emerald Bay)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 청잣빛 물빛은 더욱 진하고 눈부시게 빛난다. 마치 데칼코마니 사이를 유영하는 착각이 든다. 유일한 섬 '펜네트섬(Fannette Island)' 왼쪽을 가까이 지나간다. 섬 꼭대기에 있는 조그마한 티하우스(Tea House)가 보인다. 지붕 없는 티하우스, 무슨 이유로 담벼락만 세워 놓았을까.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싫었을까, 온몸으로 햇볕을 맞으며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함일게다. 백사장이 있는 숲 속에 스칸디나비아 양식의 맨션 '바이킹쇼움(Vikingshollm Castle)'이 있다.

해가 지자 싸한 바람이 맵다. 고산지대라 그런지 6월 중순인데도 볼이 얼얼하도록 차갑다. 장작불에 돌을 데워 텐트 속 침구에 넣는다. 텐트 위로 침엽수 이파리가 후드득 떨어진다. 귀를 세운다. 뉘 집에서 베 짜는 소리,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어디선가 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도 텐트를 치고 호롱불 아래 타자기로 집필하는 소리도 간간이 섞여온다.

밤이 깊어간다. 별무리가 가슴에 다가오고 호수에 비친 달빛이 은은하다. 호수 위로 잔바람이 휘 지나간다. 순간 호숫물은 파르르 떨고 있다. 이 떨림은 가슴속에 파고드는 신음 같고 영혼에의 이끌림이리라. 

별무리를 쳐다보며 뜬금없이 천년의 세월을 생각한다. 
나는 호수와 주변의 숲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새벽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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