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 / 전 동국대교수겸 학장

동서갈등의 시작은 삼국시대로 소급된다. 고구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영역을 확보했다면, 신라와 백제의 경우 반도 남쪽의 경주와 부여에 거점을 두었다. 방위와 연계시킬 때 신라가 동쪽이라면, 백제는 서쪽으로 분화된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삼았더라도, 삼국(三國)통일의 주역마저 신라였음으로 동쪽이 오히려 앞선 위치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삼국은 한민족으로 구성된 부족국가였지만 공존공영보다 대립과 견제에 주력해왔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등장과 더불어 당나라세력까지 물리치는 쾌거를 보였다. 그러나 자중지란(自中之亂)에 휘말려 멸망을 자초하게 됐고 계백 장군이 영도해온 백제는 황산벌 전투에서 용맹한 신라화랑도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이때부터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위상을 굳혔지만 안일함과 사치스러움에 빠져들었다.

그런 결과 경순왕이 저항도 못 한 채 왕건에게 옥쇄를 헌납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마의태자는 부왕에게 반항하며 금강산 입산(入山)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것이 삼국시대의 종말이지만 이후 원상회복하려는 데서 후(後)삼국이 등장했다. 후(後)고구려를 앞세워온 것이 궁예(弓裔)라면, 후(後)백제를 앞세워온 것이 견훤(甄萱)이다. 이들은 세력을 확장하는데 주력해왔음으로 민족분열과 대결구도만을 키워왔다.

왕건은 후고구려 세력에 속했다. 하지만 궁예의 권력남용을 계기로 왕건이 그 자리에 앉게 됐음으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온 처지다. 

왕조를 건국할 때 국호(國號)를 고려로 내세우는 한편, 북진정책을 강화하며 고토(古土)수복에 주력해온 것도 이런데 연유한 것이었다. 후고구려를 매개로 삼은 인연과 관계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왕건을 향한 신숭겸(申崇謙)의 충절이 있었다.

간과해서 안 될 점은 왕건이 남긴 유조(遺詔)다. 거기에는 '차령산맥이 남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글귀가 나온다. 차령산맥은 오늘의 충청도 일부, 호남지방 전체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거부감을 떨치지 못해 온 것을 의미한다. 억한(億恨)이 없고서 드러낼 수 없는 심경표현인데, 후백제의 견훤과 철천지원수로 살아온 것이 요인이었다.

견훤은 한때 백제의 고토 범위를 벗어나 신라영토를 향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근거로서 대구근처에 자리한 팔공산은 양대(兩大)세력이 충돌해온 격전(激戰)지였다. 

이때 왕건을 따르던 신숭겸을 비롯하여 여덟 장수가 전사하게 되었으니 왕건으로써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대감을 키우게 됐다. 오늘로 이어지는 팔공(八公)산이란 이름도 이때 전사한 공신(功臣)들을 추모한데서 시작됐다.

중요한 것은 왕건과 호남과의 사적(私的)인연도 크게 작용했었다. 왕건은 호남을 제압하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영산강변에 이르렀다. 이때 강변에서 만난 것이 장화왕후였다. 이후 혜종(惠宗)을 출산하면서 왕후로서 위상을 굳혔지만 사사건건 간섭하는 왕후의 자세에 왕건은 분노하고 있었다. 줄곧 야전(野戰) 생활로 이어온 왕건에게는 보듬어주는 손길이 필요했던것이다.

하지만 장화왕후는 오씨(吳氏) 집안의 기질로 하여금 그렇지 못하게 한데서 내면적 불만이 싹텄고, 출신 지역까지 통틀어 혐오(嫌惡)하게 되었다. 이런 감정도 나중에 생각과 마음을 바른길로 전환할 때 고쳐나갈 수 있음을 신심(信心)으로 깨우치게 됐다. 그래서 충청도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설립했고 과거를 용서하는 마음과 태평세월을 열어가려는 취지를 현판에 달아냈다. 

암시하는 것은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는 길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수용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동서(東西)갈등 해소도, 이를 솔선수범하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