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가림 호서대학교 교수 / 논설위원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반대 시위가 갈수록 격화하면서 중국이 비상계엄 선포 등 강경 대응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난 9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송환법의 입법절차를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 천명한 후, 시위가 일단락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사태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실 100만명과 200만명이 시위에 참가한 6월 9일, 16일과는 달리 지난 21일에는 약 43만명이 모였다. 하지만 행진이 끝난 후 거리에 남아 경찰과 대치하는 이들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물리적 충돌도 빈번해지고 있다. 반송환법 시위가 국제적 주목을 받는 이유는 홍콩과 중국 간의 특수관계에 기인한다. 1980년대 초, 중국과 영국은 홍콩 반환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중국은 영국에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一國兩制)'와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港人治港)', 그리고 '고도의 자치(高度自治)'라는 3가지 원칙을 '50년간 보장'하겠다고 확약했고 영국은 1997년 7월 1일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이양했다.

그러나 '일국양제'란 전대미문의 실험은 순조롭지 못한 실정이다. 시작은 언론과 교육 부분에서 먼저 나타났다. 중국은 언론과 교육이 통치의 근간이라 판단하고 있지만, 중국식 언론과 교육시스템은 홍콩인들은 물론 중국인들에게조차 매력적이지 못했다. 2000년대 초부터 전개된 언론 장악은 이미 상당 부분 친중국화로 변질됐고, 다양성과 국제화가 장점인 홍콩의 교육도 베이징으로부터 심한 스트레스-테스트를 받고 있다.

백 년의 수치를 극복하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홍콩에서 여전히 영국식 교육이 진행된다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오성홍기를 향해 애국심을 고취하며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위대한 중화의 부흥을 광동어가 아닌 표준어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만은 2014년 6월 10일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란 백서로 나타났다.

백서는 '홍콩의 관할권은 중앙정부가 전면적으로 보유하며,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다'고 규정해 중국과 홍콩이 수직적 관계임을 명확히 했다. 같은 해 8월 전국인민대표대회는 2017년부터 약속된 행정장관의 직접선출을 무산시켜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운동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번 시위의 특징은 2014년의 '우산혁명'과 비교해 더 폭력적이며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79일간 지속했던 2014년 시위에서도 적잖은 마찰이 있었지만 대체로 평화적이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분위기가 주류였지만, 올해의 시위는 홍콩의 미래를 비관한 자살자가 입었던 '노란 우의'와 시위대의 '검정 복장' 그리고 시위대를 지하철 역사에서 무차별 폭행하는 '백의(白衣) 테러단' 등의 상징적 코드가 참가자들의 결속에 연결고리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시위의 장기화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코드와 함께 물리적 행사의 합목적성이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23일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한 대학이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80%가 시위대의 폭력 행사를 이해한다고 응답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부분의 설문 대상자들은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대답했다.

  『맹자』<공손추>에는 '발묘조장(拔苗助長)'이란 말이다. 벼가 더디 자란다고 벼의 순을 잡아 빼면 약간 더 자란 것 같이 보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벼가 하얗게 말라 죽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느린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멈추는 것이 두렵다'고 되내이면서도, 왜 홍콩에 대해선 그리도 조급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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