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 풍덩 빠지고 싶은 계절이다. 사방에서 열덩이들이 몰려와 사람을 흐느적거리게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 뉴스와 백색국가 제외 뉴스는 피를 거꾸로 돌게 한다. 그래도 견뎌야 하는 계절이라는 게 서럽다. 이런 날은 소나기가 제일이다. 하지만 오락가락 하는 비와 태풍은 농부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있다. 양파·마늘가격 폭락으로 댕강대강 목숨이 날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총체적 난국이다. 어디 가서 이 한풀이를 할 것인가. 

도요새 한 마리가 제 몸 겨우 지탱할만한 바위에 올라서서 물을 쳐다보고 있다. 그 깊은 눈에 물기가 서려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부리를 내려 물들을 콕콕 집어삼킬 수만 있다면, 저 바다를 건널 수만 있다면…, 아마 이런 생각에 잠겨 있지는 않을까. 

새의 푸른 다리에 마디를 본다. 몸통에 붙은 다리의 마디를 기준으로 1대2의 비율이다. 제 몸을 지탱하기 위한 황금률일 것이다. 그런데 새에게 다리는 어떤 의미일까? 순간, 날개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무식한 생각이 끼어들면서 이어지는 질문이다. 다리 없는 새라고 하는 극락조가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영화 1990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이다. 홍콩 최고 권위의 시상식인 홍콩금장상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5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는  "다리 없는 새는 힘들어도 바람 속에서 잠을 자는데 땅에 내려오는 날은 단 하루, 새가 죽는 날"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다리 없는 새는 메인 데 없이 떠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의 은유일 것이다.

영화에서 아비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 분)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아비에게 마음을 빼앗긴 수리진은 아비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구속받기를 결혼을 거부한다. 그 후 댄서인 '루루'(류가령 분)와 사랑을 이어가지만 그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끝난다. 한편 수리진은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그는 1분을 가리키면서 영원히 날 기억할 거라고 했어요..."라며 아비를 잊지 못하고 기다린다. 순간을 영원처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아비의 예언은 맞았던 것이다. 

1분이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순간일 수도 있고 영원일 수도 있는 시간이다. 시간은 원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을 생각하는 순간, 시간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형체를 만질 수도 없거니와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역사가 만들어지고 운명이 바뀌는 시간이기도 하다. 영화 속 수리진처럼 말이다. 끝없는 시간을 헤매고 유영하는 아비와 달리 수리진은 아비와 만났던 그 시간, 1분을 영원처럼 기억하려 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들을 떠나게 하고 기다리게 하였는가. 

사랑은 끝이 없다네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서도 그대가 내 마음속을 걸어다니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 많은 강을 건너서도 그대가 내 가슴에 등불로 환하겠는가 사랑에 끝이 있다면 어떻게 그대 이름만 떠올라도 푸드득, 한 순간에 날아오르겠는가 그 겨울 새벽길에  하얗게 쓰러진 나를 어루만지던 너의 눈물 너의 기도 너의 입맞춤 눈보라 얼음산을 함께 떨며 넘었던 뜨거운 그 숨결이 이렇게도 생생한데 오늘도 길 없는 길로 나를 밀어가는데 어떻게 사랑에 끝이 있겠는가 시린 별로 타오른 우리의 사랑은  이제 너는 잊었다 해도 이제 너는 지워버렸다 해도 내 가슴에 그대는 피어나는 눈부신 그 얼굴 그 눈물의 너 까지는 어찌 지금의 네 것이겠는가 (박노해 시, 「사랑은 끝이 없네」중)

"오늘도 길 없는 길로 나를 밀어 가는데", 참 괴로운 시구다. <아비정전>에서 아비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떠난 이유는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은 다리 없는 새가 되어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그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를 사랑했다. 양어머니도, 수리진도, 루루도. 하지만 그에게 지금 여기에서는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가 되지 못했다. 어딘가에 있을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비는 다리 없는 새가 되고 싶었지만 다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딘 가에 착지해야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천국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다리 없는 새는 없다고 한다. 신화에서 극락조는 천국의 새이지만 역사 속에서 극락조는 학살당한 새이다. 사람들이 극락조의 깃털이 탐이 나 다리를 잘라 팔게 되면서 극락조는 다리 없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새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학살당하는 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파도 앞에 선 새의 운명, 그 또한 요즘 대한민국 국민이 느끼는 체감과 흡사하리라 싶다. 사방에서 들이대는 견제의 칼날, 시시각각으로 촉각을 세우지 않으면 대낮에도 코 배어 갈 것 같은 살얼음이 느껴지는 뜨거운 여름이다. 어쩌면 지금이 내 자리를 다시금 확인해야하는 시간이 아닐까.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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