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삼 전 UNITAR 제주국제연수센터 소장·논설위원

1945년 8월 6일 아침 08시 14분. 히로시마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 위 580m 상공에서 '번쩍' 섬광이 터졌다. 삽시간에 주민들이 열과 불, 그리고 핵폭풍으로 죽어 나갔고 주위 3.2㎞ 직경 내 거의 모든 건물이 내려앉아 깔려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즉사를 용케 피한 주민들도 방사능 오염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이처럼 최초의 원자탄으로 사망한 사람이 당시 히로시마 인구 35만의 반이 훌쩍 넘는 20만 명에 달했고, 한국인 2만 명도 함께 희생당했다.

이후 히로시마에는 핵무기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짙게 드리웠다. 핵 폭으로 뼈대만 남은 돔 건물이 있는 곳에 평화공원과 평화박물관이 설립됐으며, 반핵·반전 운동의 진원지로서 연관 행사가 줄을 잇고 단체 관광객이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고 있다. 이래서 히로시마는 평화주의자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고 '히로시마는 평화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정착시켰다.

제주도는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비극적 역사를 안고 있다. 제주 4·3은  해방 후 사회 혼란 속에서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필자가 사는 아라동 둘레길을 따라가면 중산간 지역에 웃인다 마을이 있는데, 제주 4·3 당시 약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가 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희생됐고 살아남았던 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마을의 옛 모습은 사라졌고 방앗간 터만 잡초 속에 묻혀 있다.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제주 4·3은 제주에 평화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4·3 평화공원에서는 해마다 희생자 추모제가 열리며 원한과 분노가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되도록 애쓰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2005년에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으며, 제주국제평화센터와 제주평화연구원이 세워졌고, 매년 개최되는 제주포럼은 동북아와 세계 평화 정착을 위해 한 장씩 벽돌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정 마을에 설치된 해군기지가 세계평화의 섬 정신에 위배 된다는 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고, 비무장 섬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세계평화의 섬'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이 현재 진행형이다.

서유럽의 지상 낙원 스위스를 살펴보자. 약 25년 전으로 기억한다. 당시 유엔 회의 참석차 제네바에 갔다가 기차역에서 눈에 익은 장면을 목격했다. 군에 입대하는 자식을 떠나 보내는 부모가 불안하고 슬픈 눈빛으로 아들과 작별인사를 하는데, 그 모습이 논산 훈련소 입대를 배웅하는 우리나라 부모의 모습과 많이 흡사했다. 스위스는 지금도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21주간의 강도 높은 훈련에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또 한가지, 스위스의 각 가정에는 지하 방공호가 있다. 건축설계에 지하 방공호가 빠지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으로 '영세중립국=평화'를 의미하리라. 그러나 스위스 국민들 생각은 다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이 넘볼 수 없게 국방력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다.

우리나라는 영세중립국이 아니라 분단국가다. 지금도 한반도 북쪽에서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증강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히로시마에서 느낀 바는 어떠한 상황에도 북핵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결이 능사가 아니다. 대화와 교류를 통해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평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평화추구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때를 대비해서도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평화를 추구해 온 일본의 예에서 그리고 스위스의 예에서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야할지 따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세계평화의 섬' 제주 4·3의 상흔을 치유하고 한반도에서 나아가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긴급사태 시 제주도가 실질적으로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결국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실현도 '힘이 없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원칙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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