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편집부장 대우
사람들이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 상처가 너무나 크고 깊어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물지 않을뿐더러 남들에게 하소연 할 수조차 없었다면 더욱 그렇다. 가까이는 제주4·3의 비극을 오롯이 겪어낸 도민들이 있고 우리 근·현대사의 격랑속에서 아픔을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선 용기있는 이들이 있다.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992년부터 올해 1월 세상을 떠날때까지 27년간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끝까지 투쟁한 여성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얼마전 개봉한 영화 '김복동'은 지난 1992년 김복동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는 육성 녹음으로 시작된다. 김복동은 그 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처음으로 개최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다.김복동의 증언을 계기로 아시아 여성들의 피해가 신고되는 등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이후 미국·유럽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증언하고 강연을 한다. 매주 수요시위를 이끌며 일본의 사죄를 촉구한다. 일본 정부의 차별로 어려움을 겪는 재일 조선 고교생을 위해 사재를 털어 장학금을 전달한다.
심지어 일본 규슈에 강진이 나자 피해를 입은 주민을 위해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성금을 보낸다. 2015년 박근혜 정부때 굴욕적인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반발해 화해·치유 재단의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도 벌인다. 김복동의 투쟁에 시련은 없었을까. 예순을 넘긴 나이에 진실을 폭로했을 때 가족들이 떠나갔다. 수치, 굴욕, 공포, 침묵이 뒤섞인 세월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김복동을 일으켜 세웠다.
혹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언제까지 피해자 타령이냐고 말한다. 일본이 과연 사죄를 하겠냐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본다. 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김복동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용기에 많은 이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공감했다. 아픔과 상처를 딛고 평화의 길을 열어준 김복동, 이젠 여성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