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YWCA회장 / 논설위원

지난 7월 초, 여성주간을 맞아 제주 YWCA에서는 '디지털성범죄'를 주제로 양성평등 세미나를 2회에 걸쳐 개최한 바 있다. '제주는 디지털성범죄의 청정 지역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으로부터 출발해 계획한 세미나였다.

달포가 지났건만 세미나 말미에 보았던 어느 희생자의 추모 영상은 먹먹함으로 가슴을 맴돌고 있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자신과 옛 연인의 성관계 동영상이 무차별적으로 뿌려지는 상황에서 삭제하고자 갖은 노력을 한다. 악성 게시물을 지워주는 인터넷 장의사에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의뢰도 해본다. 그러나 불 번지듯 번지는 다시 올라오는 영상의 유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유리창과 살림도구들은 테이프를 덕지덕지 감고 있었다.

깼다 붙였다를 반복한 흔적이다. 분노와 절망, 살려달라는 비명과 살아내려고 발버둥 친 피해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피해자의 영혼은 살해당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회적 타살이다. 죽어서도 죽지 못했다.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 동영상은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업로드와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퍼져나갔다.

디지털성범죄는 젠더폭력과 과학기술의 결합으로 만든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이다. 상대방의 동의없이 신체를 촬영하거나, 동의하에 찍은 영상이라도 무단유포, 유포하겠다는 협박, 저장, 전시하는 행위, 디지털 공간에서의 성희롱과 이미지 전송 등 성적 괴롭힘을 가하는 행위를 포괄한다. 기본적으로 성폭력이지만 디지털 공간이 갖는 특수성이 결합돼 독특한 특성을 보인다.

지난해 직원폭행 갑질 영상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던 양진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디지털 성범죄 유통구조가 밝혀진 바 있다. '동영상 올리기(업로더)-웹하드(유통)-필터링업체(불법 파일 차단)-디지털장의사(불법 파일 삭제)' 등 이들은 모두 한통속으로 카르텔을 형성해 수익을 챙겼던 것이다. 

'디지털성범죄자에 징역형' 청와대 청원 사흘 만에 20만을 돌파하는 등 사회문제로 진행되면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됐고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처벌 범위와 형량이 높아졌다. 관련 정부 부처들도 적극 관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디지털성범죄는 처벌수위를 높이고 정부의 강력한 단속만으로는 완전박멸을 기대하기 어렵다. 법이 범죄의 진화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렇다면 디지털 성범죄를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비자가 없으면 생산되지 않는다. 불법 촬영물을 공유하고 보는 행위가 용인되는 잘못된 문화가 종식 된다면 차단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이 '보는게 무슨 죄야'라며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며 동조하고, 최소한 방조해 왔다. 국산 야동, 골뱅이, 국노 등으로 쓰여 있는 영상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즐감하세요'라며 카톡에 올렸고, 엄지척, 좋아요를 마구 눌러댔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신상을 파헤치고, 피해자들도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별명을 붙이고, 얼굴평가, 몸매평가 등 2차 가해에 가담까지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해왔다. 이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많이 늦었다. 정말 많이 늦었지만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범죄'라는 인식을 남성들 스스로 가져야 한다. 더불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남성들 사이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 이 병든 문화도 바뀌게 될 것이고 피해자의 삶은 물론 영혼까지 파괴하는 디지털성범죄도 차단될 것이다. 불법 디지털 영상을 보는 일은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폭력이자 범죄이다. 공범이 되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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