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 / 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가슴에 용의 문양이 선명한 곤룡포를 입은 젊은이가 헬멧을 쓰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 나간다. 아! 저래도 되는가 하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는 쓴웃음을 짓고 만다. 경복궁 주변엔 한복 대여점들이 성업 중인데, 한복을 입으면 궁 출입이 무료이기 때문에 젊은이들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의 한복 차림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주로 쌍을 이룬 남녀들로 남자들은 흉배가 붙은 조선 시대 고관들 모습이 주를 이루고, 여인네들은 요란스러운 색깔로 장식된 치마저고리가 주를 이룬다. 광화문 근처나 경복궁 안뜰을 거닐고 있는 이들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마치 그 옛날로 되돌아간 듯 착각하게 된다. 관광 효과를 거두기엔 좋은 발상이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옷의 질감이 값싼 나일론에다 왜 그토록 휘황찬란한지 도무지 한복이 가진 우아한 품격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복체험이 없는 젊은 세대는 잠깐 입고 벗는 것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한복을 입어본 세대에겐 더없이 씁쓸한 느낌을 안겨줄 뿐이다. 외국인들도 이것이 전통적인 한국의 복식이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통해 우리나라를 거쳐 간 서양 사람들에 의해 당시 풍속이 자주 언급된다. 특히 여인네들의 옷차림에 대해 상박하후(上薄下厚)하여 옷차림이 단정하고 아담하다고 상찬해 마지않는다. 저고리는 조이고 치마는 넓게 퍼진다는 말인데, 이는 한국 여인네들 체격에 어울리도록 고안된 디자인임에 틀림없다. 당시 여인네들 체격이 하체가 짧고 상대적으로 상체가 긴 편이니까 이를 커버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당대 미의식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요즘 젊은 세대는 서양인 체격과 별다를 바 없는 늘씬한 하체를 자랑하고 있어 굳이 이 같은 디자인에 구속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체격을 고려한 개량 한복이 출현할 듯도 하다. 

의식주는 그 나라의 문화를 대변해주는 요체와 다름없다.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옷이나 식생활, 그들의 거주 공간으로서 집을 보는 것이 첩경이다. 의식주엔 그들의 삶의 양식이 배어있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유추하게 하고,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간파하게 한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거쳐 간 서양인 가운데 엘리자베스 키츠란 영국 여류화가가 있다. 그가 남긴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일련의 목판화는 그 어떤 자료보다도 당시 우리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그가 그린 남녀 의상이나 아이들 옷을 보면 얼마나 경이로운 감탄을 자아냈을까 짐작하게 한다. 남자들은 흰 두루마기에 넓은 체가 달린 갓을 쓰고, 여인네들은 치마와 저고리의 색깔을 달리하면서 조화로운 모습을 보인다. 아이들은 색동으로 천진하면서도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어릴 때 특히 명절날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 여인네들의 한복이 주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외국인들에게 보였던 한복의 아름다움도 그처럼 눈부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요즘 관광지에서 보는 한복은 왜 이토록 천박하게 보이는 것일까. 천의 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색채의 부조화와 요란한 디자인이 주는 불협화음은 보는 이를 곤혹스럽게 한다. 원형은 그런대로 지켜지고 있지만 천의 질감이나 색채의 조화에 있어 도무지 보아줄 수가 없다. 거기에다 옷매무새에서 우아함을 자아내야 하는 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전통을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예스러움을 제대로 살리고 그것이 어떻게 현대 생활에 어울리는가를 연구하고 실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한복 디자이너들에게도 책임이 무겁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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