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 문학평론가·수필가 / 논설위원

보름 전 노랑 맨드라미와 붉은 맨드라미 두 다발을 선물 받았다. 1년생 초본식물은 해바라기가 대부분인데 좀 생뚱맞다 싶었다. 꽃대가 길어 우산을 꽂아 놓던 목이 좁고 허리가 굵은 둥근 무색 유리어항에 열 송이를 꽂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꽃향기는 없고 수탉 닭볏 같은 비늘 모양이라 분위기가 밋밋했다. 동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베타(Flighting Fish) 한 마리를 넣기로 마음먹었다. 99센트 가게 몇 군데를 들렸으나 고객이 없어 고기를 안 갖다 놓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꽃은 고향을 애타게 그리다 목이 말랐는지 엄청나게 물을 빨아들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긴 타원형인 이파리가 누렇게 변했다. 노랑 맨드라미 속대는 일반 식물과 같이 푸른데, 붉은 맨드라미의 속대는 붉고 목대 부분은 전투태세를 갖춘 싸움닭처럼 날이 돋아 있어 보기가 불편했다. 책상을 뒤져 흰색 꼬리표(Marking Tags)를 찾아냈다. 목대에 하나씩 묶고 꼬리표에 파랑, 노랑, 초록 등의 맨드라미와 대비되는 매니큐어를 칠했다. 단순했던 열 송이 맨드라미는 색색별 넥타이를 한 것 같고 분위기가 바뀌었다. 

목대에 걸려 있는 여러 색의 꼬리표를 보니, 50년 전 기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형은 대학졸업반이었다. 형이 다니는 국립해양대학 교복에는 검은색 넥타이를 매었다. 어느 날인가 형이 입던 검은 여름용 양복 윗도리와 검은색 넥타이를 내게 선물했다. 그러나 한 번도 넥타이를 매 본 적이 없었기에, 우리 집 가게에서 사진관과 미장원을 운영하는 두 주인에게 넥타이를 매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미팅장소에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행동은 촌스럽고 우스꽝스럽지만,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목에 감고 당겼다 풀었다 했던 기억, 매듭이 잘 된 넥타이는 머리가 넉넉하게 빠져나오게 했다. 그리곤 계속해서 사용했던 일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지금도 그때 배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 있다. 아들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미국에 들어왔다. 워싱턴주 터코마커뮤니티대학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에 갈 일이 있다면서, 나한테 넥타이 매는 법을 요청했다. 자식놈도 몇 번인가 아비처럼 되풀이 연습을 하다가 지금은 부자간 똑같은 방법으로 넥타이를 맨다. 

40년이 지난 또 하나의 추억이 떠오른다. 서울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원주 상지대학에서 강의하던 어느 초 겨울철이다.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부산에 가야 할 일이 있어 원주에서 동해선 완행기차를 탔다. 코트도 없이 양복 차림으로 부산으로 출발하는데 야간 객실은 남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춥기까지 했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이 내가 추위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아무 소리 않고 자신의 한쪽 치마폭을 나의 두 다리 위에 덮여 주었다. 짙은 가지색 비로드였는데, 그때 여성의 치마폭은 보기와 달리 꽤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양복색과 넥타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주며 남자는 넥타이, 여자는 스카프 색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루이 14세 때 원병(援兵)으로 파리에 온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목에 가린 다목적용 흰 천이 넥타이로 변형된 것을,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는 "넥타이 색을 선택하는 것은 본능과 예술적 영감이며, 자신의 멋을 순간적으로 창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넥타이 예찬가인 발자크식(式) 발상이 아닌가 싶다.

보름이 지난 열 송이 맨드라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항에 든 물을 부엌에서 쏟아내다가 오른손이 미끄러져 식탁 모서리에 어항이 부딪쳐 깨어지고 말았다. 맨드라미를 그릴 때마다 꽃 속에 독사 한 마리가 숨어 있고, 뒤엉킨 줄기에는 생존의 아귀다툼 같다고 말한 화가 김지원의 독백을 되새기며, 깨진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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