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석 이학박사 / 전 동국대교수겸 학장

한국과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국경이 맞닿아있다. 이것이 '빈번한 접촉'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촌(四寸)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가까운 친척사이도 '경쟁심을 촉발'하고 있다. 하물며 민족과 역사가 다른 나라일 경우 '치열한 경쟁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한일관계도, 시작부터 '대립하지 않아온 점'에 있다. 

백제의 왕인(王仁)은 대표적 사례다. 당시 문화에서 앞선 것이 백제였고, 일본을 향해 영향을 행사하면서 '태자(太子)의 스승으로 위상'을 굳혀왔다. 이를 입증하듯 일본에서 '왕인을 박사로 칭송(稱頌)'하는 한편 선진문화를 전파한 '공로자로 예우'하며 나라(奈良)에 관련 흔적들을 남겨 놨다. 이때의 출발점(Origin)은 '금강하류의 구드레'이다. 

일본에서 백제를 '구다라'로 표현해온 것도 이런데 연유한다. 그만큼이나 나라지방은 한일 간에 '해로(海路)의 종착점'으로 기능해왔다. 

선진문화도 이곳과 같은 '종착점(Destination)'을 향해갈 것이고 통혼(通婚)으로 이어진 사실에 대해 아키히토 천황이 공인해왔다. 한민족이 일본을 개화시키면서 선진화토대를 마련해온 증거이다. 

고려 때는 동해에 인접한 '쓰시마(對馬島)'를 배려해왔다. 한민족이 갖는 '측은한 마음'이다. 
대마도는 땅이 좁은데다 토질마저 척박했다. 그래서인지 고려를 '시범(示範)국'으로 여기면서 조공(朝貢)해왔고 고려왕조는 이에 대해 '곡물로서 보답'했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마도가 '왜구(倭寇)의 활동거점'으로 변하면서 세종 때에 '정벌(征伐)지'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후 세계로 확산된 해양문화는 '일본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국가위상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다. 이때에 한국은 '당파싸움에 젖어온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발달된 서구(西歐)문명을 수용하며 '화력(火力)으로 무장'하는데 힘썼다. 이것이 단초가 돼 '임진왜란을 촉발'하는 한편 이후에 다가온 군국(軍國)세력은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도록 강제하게 됐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기해서 미국에 패(敗)하면서 일본은 다시 추락국면을 맞게 됐다. 한국동란을 맞이해서는 패전국이면서 뒤로 밀려났지만 이것이 오히려 호기(好機)로 작용 했다. 전쟁터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패전국 이전 상태로 산업시설을 복구해놨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에게는 부흥기회이면서 적대(敵對)관계였던 '미국과 친밀관계'로 전환(Turning Point)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패전국상처를 잊으면서 '국제적 위상'까지 높여갔다. 그렇다면 '이런 기회를 부여한 것'이 한국이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식민정책을 펼쳐온데 대한 사죄(赦罪)'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에도 진심(眞心)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제 대립각과 더불어, 무역규제까지 펼치면서 '한국을 압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변을 에워싼 '망망대해(茫茫大海)'와 같은 관대함이란 일본에서 찾을 수 없게 됐다. 뿐만 아니라, 강자에 아첨하는 '간교(奸巧)한 본성'만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식민시대의 제반사'로 하여금, 한일양국 간에 대립만을 키워왔다. 

한국은 60년대로 소급할 경우, 국가재건에서 자본이 필요했음으로 여기에만 집착해 '한일 간 청구권협정'에서, 졸속처리가 없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됐다.  

이에 대한 점검을 위해 원점(原點)회귀는 물론, 이성(理性)에 근거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게 됐다. 또한 재일교포와 한일의원협의회에 '제주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점을 의식하고, 양국번영을 전제하며 '현안에 대한 조정자(Coordinator)역할'을 위해서 지혜롭게 노력해나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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