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서 온통 갈내음이 풍기는 계절이다. 처서 지나 추석 앞두고 제주의 바람은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와 마른 풀냄새를 사방으로 실어 나른다.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석상 위에 올려 진다. 한 조상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사는 처지가 다르고 생각들이 달라 세상인심이 내 맘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에 누군가는 서글퍼지기도 할 터이다. 

어느 밭 한 곁에 있는 무덤가에 풀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둥그런 봉분 한 귀퉁이가 움푹 패기도 하였으나 말끔히 깎은 머리가 시원스럽다. 산담도 없고 비석도 없는 무덤이다. 돌이 많은 제주는 대체로 조상 무덤가에 산담을 쌓는 일이 예사였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던 집안이 있었다. 돌이 많다고 하여 산담을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산담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밭을 넘고 또 넘어 다른 조상의 묘를 찾아가는 길에 풀이 무성한 무덤을 보게 된다. 늦은 벌초를 하려나 싶다가도 대 끊긴 어느 집안의 조상인가 싶어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한다. 살아서도 축복받지 못한 자, 죽어서도 천대받는가 싶어 안쓰러워지는 것이다. 무덤은 아무 말을 하지 않는데 지나가는 이는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에 잠긴다. '저 안에 잠든 이 누구일까' 하고 말이다. 

어느 모임에서 '죽음 테라피(Death Therapy)'를 하시는 분을 만난 적 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하고 있단다. 이야기의 주제가 죽음이라서 다들 우울해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오히려 진지하고 유쾌하다고 화답한다. 죽음을 먼저 생각해야 삶을 생각할 수 있고, 죽음 이후를 상상하다보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보인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잖아요. 

'죽음'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궁금하다. 한국어 '죽다'의 어원은 르완다어 'Jugunya'(버리다)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르완다어 'Zuka'는 '부활하다'의 뜻으로 한국어 부사 '죽'(내내의 뜻)과 유사하다. 즉, 죽음은 '영원히 다시 살아나다'의 의미라는 것이다. 

내 무덤 앞에서 눈물짓지 말라. 난 그곳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 난 수천 개의 바람이다. 난 눈 위에서 반짝이는 보석이다. 난 잘 익은 이삭들 위에서 빛나는 햇빛이다. 난 가을에 내리는 비다.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눈을 떴을 때 난 원을 그리며 솟구치는 새들의 가벼운 비상이다. 난 밤에 빛나는 별들이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라. 난 거기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 (어느 인디언의 시 중에서)

죽음이 수천 개의 바람으로, 한 마리의 날개짓이라면 굳이 무덤 앞에 가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겠다. 내 어깨를 스치는 바람에도 죽음의 정령이 묻어 있고 밤하늘의 별빛에도 죽음의 눈빛은 서리어 있을 테니 말이다. 삶의 매 순간에 죽음의 정령이 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섬뜩하기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할 터이다. 못내 아쉽거나 혹은 용서를 구하지 못한 죽음 있다면 스치는 바람에게, 별빛에게 마음을 고백해도 좋겠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알렉산더 페인, 2002)는 갑작스레 아내가 죽는 사건을 계기로 다시 살기로 작정한 노인의 이야기다. 워렌 슈미트(잭 니컬슨 역)는 42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퇴직한 얼마 후 갑작스럽게 아내 헬렌(준 스큅 역)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이한다. 얼마 있으면 결혼한 딸 지니(홉 데이비스 역)도 있는데 말이다. 아내를 잃은 충격을 안은 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아내가 자신의 친구와 주고받은 불륜의 편지를 발견한다. 충격과 배신감에 분노가 치오른 슈미트는 캠핑카를 몰고 여행을 떠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는 등 과거의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보낸 어느 날 밤, 밤하늘의 별빛을 보면서 슈미트는 고백한다. "지나간 일은 용서할게. 내가 그렇게 잘한 것도 없으니. 나도 당신을 실망시킨 일 많았던 것 같아. 용서해줘." 라고. 그리고 딸의 결혼 준비를 위해 씩씩한 발걸음을 옮긴다. 

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편지 한통이 배달된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고아 소년 엔두구의 그림편지이다. 슈미트는 엔두구에게 매달 후원금과 편지를 보내고 있던 참이다. "엔두구는 온종일 당신 생각뿐이에요. 당신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빌고 있죠." 엔두구를 돌보고 있는 성심수녀회 나딘 고티에 수녀가 쓴 편지이다. 편지 속엔 자신과 엔두구가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 동봉 돼 있다. 슈미트는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졌다고 탄식하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엔두구가 고맙기도 해서이지 않을까. 깡마른 소년이 슈미트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해준 것이다.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 앨버트 하버드는 "고통은 어떤 사상보다 깊고, 웃음은 어떤 고통보다 고귀하다"고 말했다. 워렌 슈미트에게 찾아온 고통은 슈미트로 하여금 한층 깊은 생각을 하게하고, 탄자니아에서 날아온 엔두구의 웃음은 그를 고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눈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 눈물은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한 자아가 기필코 자궁을 뚫고 외치는 탄생의 기호이다. 새로운 서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자기서사는 과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울지 않고는 시작될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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