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은 제주대 행정학과 교수 논설위원

친구와 술은 오래될수록 좋다던가, 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중에는 중학교 때 친구들이 많다. 열대여섯 살 때 만나 반백 살이 넘었으니 삼십여 년이 훌쩍 넘도록 긴 세월을 함께 보낸 셈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한참 인구성장기였기도 했고, 또 강남권이 막 개발되던 시기이기도 해서 우리 학교는 한 학급의 인원이 70명, 한 학년이 무려 1200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년은 같은 반이 아니어도 서로를 알고, 지금까지도 반 모임은 물론 전체 동창회도 가끔 한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서로를 알게 된 데에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모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88 올림픽이 개최된 잠실종합운동장이 개장했던 1984년, 우리 학년은 올림픽경기장 개장기념 매스게임에 동원됐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꽤 탈락률이 높았던 연합고사를 통과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년 학생들은 공부는커녕 매일 뙤약볕 아래 운동장에서 매스게임 연습을 해야만 했다. 

전체 동창회를 처음 한 날은 우리가 서른 살쯤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동창 을 찾아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리저리 연락을 돌려서 제법 많은 친구들이 한꺼번에 모였다. 어떤 친구는 의사가 되었고, 어떤 친구는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제일 큰 외제차를 끌고 온 친구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강남역 근처 빌딩을 관리하면서 그 건물 1층에서 '취미로' 통신사 대리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역시 금수저 인생을 당해낼 순 없구나'라고 우린 웃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린 나름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에서 뭔가 각자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믿었으므로. 

최근 몇 달 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을 꼽으라면 '엄마 찬스, 아빠 찬스'일 것이다. 이념적 성향과 위법성 시비를 떠나 보통의 많은 국민이 느꼈을 감정은, 소위 사회적 지도층이란 사람들이 인맥과 지위를 동원해 아이들에게 넘치는 스펙을 만들어 줄 때, 아무것도 못해준 엄마, 아빠가 공연히 공부하라고 아이만 꾸짖었구나 하는 미안함과 거기에 더해 '부르투스, 너마저도'라는 허탈감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교육은 소위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 수단이다. 우리 헌법 제3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능력'이 부모의 경제적 능력을 뜻한다는 농담이 더이상 그냥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각종 통계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아파트값, 수능평균점수, 서울대 진학률, 신임법관비율에서 모두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서울시 강남구이며, 소위 명문대라는 'SKY대학'의 재학생 중 절반은 9분위(월소득 730만 원 이상)의 고소득층이다.

김희삼(광주과학기술원) 교수의 '청년의 성공요인에 관한 인식조사(2017)'에 따르면, 각국 대학생 4천명을 대상으로 청년의 성공요인을 묻는 설문에 일본과 중국의 대학생은 '재능'을, 미국 대학생은 '노력'을, 한국의 대학생은 압도적인 과반이 '부모의 재력'을 꼽았다. 교육의 기회라는 가치를 국민에게 배분하는 과정이 공정치 못하고,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회적 신뢰, 민주적 질서, 공동체 의식이 붕괴하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문제의 근원을 따지자면 좋은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꽃길 인생경로를 결정하는 뿌리 깊은 학벌주의일 테지만, 그 학벌이라는 가치조차 보통의 젊은이가 꿈꿀 수 없는 사회, 계층의 세습이 고착화되는 사회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개천표 용'이 출현하는 생태계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 사회가 시급히 개선해야 할 건전국가의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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