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며,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 하니, 밥은 따뜻하고 국은 뜨겁고 장은 서늘하고, 술은 찬 것임을 말함이니라'.
일전에 모임이 열린 어느 음식점에 걸린 한 액자의 글이 화제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바로 위의 글이 그것이다. 이 글 맨 앞에 '부인필지(婦人必知)'라는 표현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글은 조선조 시대상이 반영된 글이라 생각한다. 다만 소개된 글의 출처나 작자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없어도, 그 글자체의 형태가 순 한글 고어체로 쓰인 점으로 미뤄보면 이 글의 작자가 어쩌면 여성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나중에 여러 책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글의 출전을 확인했다. 다름 아닌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가 지은 「규합총서(閨閤叢書)」란 것이다. 인터넷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이 책을 구해 찬찬히 읽어볼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조선조 영조 때 여류 작가에 의해 저술됐던 한글본 책이다. 앞에 소개한 글은 바로 이 책 '술과 음식'의 첫 부분에 실린 내용인데, 그 서두는 대개 「예기(禮記)」와 「내칙(內則)」편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이다.
 
이어지는 글에선 인간 식생활의 맛을 고르게 함이 바로 사계절의 기운을 조화시킴과 동일하다란 내용으로 전개된다. 

'무릇 봄에는 신맛(酸味)이 많아야 하고, 여름에는 쓴맛(苦味)이 많아야 하며, 가을에는 매운맛(辛味)이 많아야 하고, 겨울에는 짠맛(鹹味)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을 적절히 고르게 하려면 부드럽고 단맛(甘味)이 나는 것으로써 조화롭게 한다'라고 적혀있다. 

결국 음식의 간 맞추기를 사계절에 조응하는 방식을 써서 그 기운을 기를 수 있음을 뜻함인데, 사소한 일상의 음식문화를 통해 이처럼 몸의 기운을 양생한다는 건강의 미학으로 발전시킨 옛 선현들의 생각이 새삼 경이롭기까지 하다. 

한편 음식점에 걸린 한 액자의 글보다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모임에 참석한 일행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와 더불어 풍부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평소 음식문화에 대한 저마다의 소감을 문학적 표현을 인용해가면서 숨은 실력을 뽐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음에서다.
때론 '쓴 나물 데온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어'처럼 봄나물을 칭송한 시조가 있는가 하면, '수국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란 가을 어촌 풍경을 노래한 시조시도 등장한다. 한편 '거친 밥 먹고 물을 마시며 팔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라는 공자님 말씀이 나오는가 하더니, 중국 진(晉)나라 시대 장한(張翰)이란 사람이 어느 가을날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 생각이 나자 그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라고 하는 이야기로 대중의 시선을 한데 모으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 제일 압권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인 부열(傅說)에게 내린 다음의 글귀를 소개하는 대목에서이다.
'그대는 짐의 뜻에 훈계하여 만일 국의 양념치기(和羹])를 하려거든, 소금과 매실(鹽梅)이 되어주라'고, 한나라의 임금이 재상이 되려는 자에게 내린 교서가 바로 음식에 있어 양념치기와 같은 역할을 주문한 것이라니.

'봄의 기운처럼 따뜻한 밥' '여름의 기운처럼 뜨거운 국' '가을의 기운처럼 선선한 장' '겨울의 기운처럼 차가운 술' 일상의 밥상머리에서 시작된 화제의 범위가 위정자의 처세로까지 확대돼 나갔다. 무엇보다 사계절에 조응하는 기운으로 음식 맛내기의 특징을 옛사람들은 잘 간파했었던가 보다. 비록 음식점에 내건 한 액자의 글이라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그 집 주인의 심경을 한 번쯤 헤아려 봄직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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