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훈식 제주어육성보전위원 시인·논설위원

'돈에 울고 사랑에 속고'라는 말이 있다. 돈 때문에 운다는 것, 참으로 서러운 일이다. 며칠 전에 오일장에서 자두를 샀다. 다른 과일에 비해 비교적 싼 편이다. 소쿠리에 담아서 팔고 있는데 한 소쿠리에 만원짜리, 7000원짜리, 5000원짜리가 있었다. 태풍이 불고 계절이 지나서 올해엔 자두가 없을 수도 있다. 보기에도 1만원짜리가 당연히 최상품이다. 하지만 돈이 아깝고 끝물이라는 생각에 5000원짜리를 샀다.

자두를 구입하면서 1만원짜리는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을 하며 깨우침을 구했다. 오래된 일이지만 새벽에 아내랑 신제주에서 중앙로까지 걸어서 채소를 싸게 파는 새벽시장에 갔다. 부지런히 둘러보고는 흙이 묻은 무를 이파리까지 붙어 있는 채 사오면서 '마트에 가면 깨끗하게 다듬은 무를 품위지켜가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일을 일부러 어리석게 땀 흘리며 와야 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싱크대 앞에서 이파리를 뜯어내고 씻고 자르는 수고를 하고 있다. 돈이 없으니 어리석음의 실천이다.

제주도 수돗물은 먹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수돗물이라서 정제된 생수를 사 먹고 싶어도 돈이 아까워 약수가 나오는 한라산 기슭 샘터까지 새벽마다 다녔던 일도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집에 와서 자두를 씻는데 시들어서 더 시고, 땅에 떨어진 것을 골라 팔았는지 멍든 것도 있고 벌레가 먹어서 상처 난 것도 있어 버리기도 했는데도 당연하고도 엄연한 체험으로 받아들였다. 싼 것이 나쁜 것이라는 결론은 오랜 체험에서 구한 정서이기에 부자가 양주를 마실 때 소주를 마셔도 감지덕지하는 마음은 돈에 대한 겸손인가 체념인가.

젊은 시절엔 비록 돈이 없어도 희망이 넘치기에 대형 마트에 가면 옷 한 벌 가격이 한 달 생활비에 가까워도 만져보는 여유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칠순이라 소변줄기처럼 돈 나올 구멍이 시원찮으니 이월상품이나 특별 할인 상품에 눈독을 들인다. 이것이 돈에 대한 겸손이고 체념에 대한 기초습득의 내공이다.

가난한 자가 건방지면 세상이 웃는다.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어떤 일로 돈을 빌려야 하거나, 일을 부탁받거나 일을 부탁할 때를 대비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어야 그나마 이익이므로 옷차림이나 표정까지, 더하며 말투까지도 다정다감하게 유지돼야 긍정적인 태도이다.

돈이 많으면 기가 살기 마련이다. 아까운 돈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기가 똥차야 한다. 너그럽고 여유롭게 남들을 대하지만 분명한 태도는 돈 빌려달라는 말인데 절대하지 말라는 눈초리가 감춰 있다. 자신이 마음결 따라 자선하거나 주는 것은 가진 자의 특권이고 강요에 의해 피나는 돈을 결코 줄 수 없다는 막강한 결의를 다지는 암묵은 가진 자의 권한이다. 그래서 가진 자는 위엄이 넘친다. 이 위엄은 돈을 지키기 위한 보호색이지만 어쩔 수 없이 늙어서 할 수 없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양도할 때는 상황이 급변한다. 품위 유지는커녕 상속절차로 '개판'일 경우가 다반사다.

같은 자식이라 똑같이 재산을 나눠 주어도 우애가 풍비박산 나는 것은 효도에 대한 부당한 계산에서 자신의 노고가 반감됐다는 소외감과 손실감이다. 창자가 뒤집어질 정도로 통증이 동반한다. 돈 때문에 혈육끼리 원수가 되는 초유의 불행이 당연한 비극으로 진화하면서 어느 손가락도 깨물면 아프다고 쉽게 비유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엄지손가락이 나머지 네 손가락보다 역할이 월등하다는 위인도 있으니 상속문제가 그 모양이다.

엊그제 지인들로부터 추석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문자를 받고는 가정불화도 없고, 추석이나 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도 부담없이 지내고 있다는 판단으로 안도했다.
하여간에 재산이 없는 나로서는 겸손과 신용을 통한 형제간의 우애가 미덕이라는 덕목이 유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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