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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상처를 더듬어 떠나는 길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입력 2019-09-30 (월) 13:52:58 | 승인 2019-09-30 (월) 13:59:17 | 최종수정 2019-11-05 (월) 15:31:53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이라 그런 건 아니다. 가을 날씨가 주는 스산함이 여름 내 찌든 열기를 식혀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날은 적당한 바람이 드는 정자에 앉아 한나절 조용히 책을 읽고 와도 좋겠다. 아니면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라도. 

추석 연휴동안 영화 '와일드'를 보며 '걷기와 쓰기'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막연하게 '걷기와 쓰기의 힘'에 대해 믿음이 있었긴 하다. 나에게도 걷기와 쓰기는 알 수 없는 보양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늘 먼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때는 전학을 세 번이나 다녀서 그런지 딱히 기억나는 친구도 없다. '단추 구멍', '토다진 사발' 등 외모와 관련한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속마음을 일기장에 많이 털어놨다. 내게 유일한 친구는 일기장, 그리고 오가며 만나는 산과 들의 나무와 꽃들이었던 것 같다. 밤길도 무서워하지 않고 잘 걸었다. 혼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래서 지금도 혼자 흥얼거리기를 잘한다.

'와일드'는 미국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가 실제 경험 94일간의 PCT(Pacific crest trail)트레킹 경험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셰릴 스트레이드 원작을 바탕으로 닉 혼비가 각본을 썼다고 한다. 세릴은 자서전에서 더러 부끄러울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아빠의 가정폭력,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후의 마약중독과 섹스중독, 그로 인한 이혼까지.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다시 살리는 길은 PCT밖에 없었다고. 

셰릴 스트레이드가 종단한 길은 무려 4285㎞에 달한다. 캘리포니아 주의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오리건 주를 거쳐 워싱턴 주의 캐나다 국경에 있는 '신들의 다리'에 이르는 여정이다. 말이 그렇지 어깨, 허리, 종아리에 상처가 덧나고 급기야 발톱까지 빠지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영화에서 셰릴(리즈 위더스푼 역) 은 자신의 몸집보다 큰 배낭을 메고, 사막을 걷고 바위산을 지나 눈 덮인 산을 넘는다. 가는 도중에 곰, 퓨마, 방울뱀을 만나기도 하고 수많은 벌레와 싸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셰릴은 야생초 잎을 부며 냄새를 맡는다. 마치 엄마 '바비'(로라 던 역)의 살 냄새를 맡듯이. 

영화는 세릴의 트레킹에 호흡을 맞추면서 자연의 오감을 따라 과거를 교차시킨다. 풍경이 스칠 때마다 고통의 순간들이 겹쳐 흐른다. 갑작스런 엄마의 암 소식, 술에 취하고 마약, 무분별한 섹스에 휩싸여 헤맨 나날들, 아빠의 우악스런 두 주먹, "전망 좋은 방이 평생 꿈이었어."라고 말하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한 마디 더, "일몰과 일출은 매일 있으니까 네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어. 너도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 설 수 있어. 네 최고의 모습을 찾으라는 거야."

셰릴의 엄마가 말한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은 묵은 발톱이 빠지고 새 발톱이 나오기까지 험난한 고통의 여정을 건너야만 알게 되는 것일까. 거대하고 신비로운 숲에 무섭고 두려운 야생동물이 살듯이 내 안에 살고 있는 두려움과 불안에 마주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보고 싶고 함께 걷고 싶다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쳤을 때 알게 되는 길일까.

셰릴은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되새긴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불행한 삶을 떨쳐내지 못해 몸의 병을 얻고 죽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엄마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던 자신, 그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는 문학의 샘이 흐르고 있었다. 몸이 지쳐 되돌아가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시구들, 무섭고 두려움에 찬 사막의 텐트 안에서도 에이드리언의 시를 읽는다.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경구를 트레킹 방명록에 적어놓기도 한다. 그들의 말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도끼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넌 해냈어'이기도 하고 '끝까지 포기하면 안돼'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그녀의 귓가에 자꾸 맴도는 노래, 그것은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엘 칸도 파샤El condor pasa'이다.

달팽이보다는 참새가 되겠어 할 수만 있다면 꼭 그럴 거야 못이 되느니 망치가 될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 꼭 그럴 거야 멀리, 차라리 멀리 항해를 떠나겠어 여기에 머물다 떠나간 백조처럼 인간은 땅에 머물러 있다가 가장 슬픈 소리를 세상에 들려 주지 가장 처량한 소리를 길이 되느니 숲이 되겠어 할 수만 있다면 그럴 거야, 꼭 그럴 거야 차라리 내 발아래 흙을 느끼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  꼭 그럴 거야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엘 칸도 파샤El condor pasa' 가사)

노래는 셰릴의 땀에 젖은 머리를 식혀주기도 하고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배낭 때문에 생긴 몸의 생채기도 잊게 해준다. 바위산과 눈 덮인 고산 지대를 넘을 때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게 리듬을 부여해준다. 급기야 숲에서 만난 소년에게 "문제들도 언젠가는 다른 것으로 변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노래는 그녀에게 따가운 햇살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고, 이마에 묻은 땀방울도 달게 마시게 해주었다.  셰릴은 '신들의 다리'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삶은, 다른 삶과 바꿀 수 없고, 신성하며...현실적이고 지금, 정말로 나에게 속해 있다. 흘러가게 둔 인생은 얼마나 야생적이었던가."라고. 그것은 4285㎞의 험난한 걷기를 통해 깨달은 고백이다. 그녀의 걷기는 새로운 삶을 쓰기 위한, 아름다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워밍업이었던 것이다. 셰릴의 삶은 걷기 이후, 지금부터다.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webmaster@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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