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문학평론가·수필가 / 논설위원

힌두교와 불교가 잘 어울려 있는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1972년부터 낮에는 베트남군, 밤에는 크메르루지 게릴라가 7년간 장악했다. 그러는 사이 전화(戰火)와 약탈로 많은 불상이 훼손된 이곳을, 십수삼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아침이라 녹림(綠林)에 둘러싸인 스라스랑(Srah Srang) 물 위로 물안개가 나풀나풀 피어오르고 있다. 손자, 손녀 같은 어린애들이 "원달러" 하며 몇 개 안 되는 염주와 사진엽서 등을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십수삼년 전에도 지금처럼 "원 달러"라고 외쳤는데, 그때와의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순간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처럼 관광객이 많지 않았을 때라, 호젓한 마음으로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른 새벽 앙코르와트를 찾았다. 좁은 사원입구에 들어서자 통로 사이에 몇 개의 초를 바닥에다 켜놓고 손님을 맞이했다. 이른 새벽이라 찬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시간이 지나자 눈앞에는 사원의 실루엣이 잔바람에 살랑대며 파란색 수채화를 그려댔고, 붉은 해는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자연과 인간이 만든 천년 세월의 합작품이 눈앞에 또렷이 나타났다. 물 위에는 붉은 수련이 듬성듬성 피어 있고 사원 돌탑에는 비둘기떼가 잠이 깼는지 날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원달러"

어둠이 완전하게 가시지 않았는데도 어디서 어린애들이 왔는지, 커피를 팔고 다녔다. 아직 한 잔도 팔지 못한 사내아이의 커피를 받아 마시면서, 지갑을 꺼내 보니 1달러 지폐가 없어 5달러 지폐를 건넸다. 아이는 잔돈을 바꿔 오겠다며 5달러 지폐를 받아들고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마음속으로 '어라,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이지'하며 툴툴거리다 주변을 촬영했다. 그런데 그 애가 달려오더니 헐떡거리며 4달러를 내게 넘겨 주는 게 아닌가.

잠시나마 이 애를 의심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돌아가는 그 애를 불러 이곳 앙코르와트를 가이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1달러면 된다고 했다. 이름은 기억 안 나고, 그 당시 아홉 살 되었다는 사내아이가 이끄는 대로 30여 분간 돌아다녔다. 어린애 가이드가 미지의 세계인 앙코르와트에 대해 설명하는 표정이 재미있기도 했다. 특히 어린애라 촘촘하게 구경시켜주며, 카메라 촬영 포인터도 잘 잡아줬다. 놀라운 것은 어이없게도 가이드로서 완벽했다. 여느 가이드의 설명 못지않았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나?"라고 물었다. 이곳에 찾아온 관광객에게 배웠단다. 짧은 문장과 단어로만 연결하는 영어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나 단 한 단어의 알파벳도 모르면서, 나무꼬챙이로 자신의 이름을 바닥에다 로마자 알파벳을 비뚤비뚤 써댔다. 

영어는 이 아이에게는 공부가 아니라, 생계와 생존을 이어가는 수단이었다. 서양 관광객을 붙잡고 배웠을 이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는 동안 나를 보며 해맑게 웃고 서 있었다. 나는 약속한 1달러가 아니라 5달러를 주었다. 두 손 모아 합장하는 어린애의 환한 얼굴을 마주하며 헤어졌다.

바이욘(Bayon)사원을 거닐다 길거리 좌판대에서 석양에 물든 수상가옥 그림엽서 한 장을 샀다. 가게 주인은 톤레삽(Tonle Sap)호수에 관해 엄지를 치켜들고 소개한다. 그곳 수상가옥에서 잠잘 수 있고, 보트를 타고 나가 낚시며 그물로 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크기는 작지만, 야자수 기름에 튀긴 '리알이랑 퉁룹'이라는 생선요리가 맛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외국인들의 나이와 상관없이 거리 판매와 가이드를 자처하는 아이들이 많다. 학교에는 가지 않고 관광지를 돌며 강한 생명력으로 생존을 이어간다. 어린애의 거친 삶을 캄보디아 정부가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쳐다보는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진다. 

거대한 얼굴 석상들의 표정을 보는데 원숭이 한 마리가 나의 바지를 붙들고 먹거리를 달라고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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