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 / 논설위원

이젠 옛이야기로 들리지만 황우석이 우리나라 과학의 선봉에 서 있던 때가 있었다. 줄기세포 배양의 꿈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실현시킬 인재로 꼽히던 시절이었다. 나라의 자랑이었고, 성장하는 세대에게는 모범적인 스승이 됐다.

그런데 왜 순식간에 무너졌던가. 과학자로서 끈기있게 기다리는 것 보다는 실험결과를 일부 조작해 업적으로 내세웠던 것이 문제가 됐다. 성실한 연구자는 자연의 이치를 발견하는 사람이지 결과를 발명하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

구약성서에 욥의 이야기가 있다.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던 삶에서 갑자기 몰락했다. 졸지에 가산이 없어지고, 사고가 일어나 자녀들도 한꺼번에 사망했다. 어려움 속에 있는 친구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내어놓는 해결책도 당사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려움을 헤치고 그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전에는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뵈옵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길을 끝내 거부하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조국 법무부장관과 검찰 개혁의 논란이 두 달 내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예년에 비해 잦은 태풍도 다들 지나갔고, 껄끄러운 한일관계도, 미국과 북한의 협상도, 홍콩이 중국정부를 상대해서 안간힘을 다해 궐기하는데도, 우리에게는 오직 조국과 그 가족이 뉴스의 초점에 놓였다.

한사코 반대하는 의견을 주창하는 검찰과 언론, 그리고 이 사회의 기득권층이 연대해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흠을 찾으려 애썼고, 취임 이후에도 기세는 식을 줄 모른다. 표창장, 웅동학원, 사모펀드를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며 난도질한 것이 벌써 열 바퀴를 넘었다. 수학시험 문제지를 보고나서 어느 하나도 집중해서 해결하지 못해 조금씩 손을 대다가 결국 답을 하나도 쓰지 못하던 때가 생각난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강도 높게 진실을 찾으려고 검찰이 명운을 걸고 달려든 적이 있었던가. 조직과 위상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고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세계 어느 곳에도 유례없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검찰이 그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든 사정기관이 합리적인 문민통제에 따라 투명하게 공익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기구로 바뀌고 있다. 그 마지막 차례로 검찰 순서가 됐다. 

석사장교로 병역의무를 다한 조국 장관의 군 복무는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 제도는 신군부가 등장하던 시대에 전두환, 노태우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특혜를 주기위한 제도였다. 젊은 시절 귀한 시간을 나라를 위해 내놓았던 사람들에게는 부럽기도 하고, 얄미운 일이다. 잘못되었다면 그러한 발상을 내놓고 돌아가는 길을 만든 사람들을 비난할 일이다. 조국의 가족을 놓고서 상실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환경과 사회제도를 비판해야 한다.

일찍이 강남좌파를 자처하며 사회와 정치권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주저없이 드러냈던 발언들이, 이제는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를 무기삼아 비난하고 조롱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운신하는데 큰 장애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검찰은 보다 냉정하게 살피고 따져야 할 것이다. 그들 또한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사태는 더 어려워진다.

장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검찰의 판단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마치 기생충 검사 정도로 건강검진을 하라는 것을, 온갖 세균과 바이러스까지 찾아내는 것으로 확대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주무장관이 인사에 개입하였으니 그 정당함을 입증해야 한다.

이제 검찰이 수사를 통해 발견한 죄과를 놓고서 기소여부를 선택할 때가 다가온다. 기소한다면, 법원이 다툼을 놓고서 판단할 것이다. 그 잘못이란 것이 검찰이 만들어낸 발명품이 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법과 원칙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검찰이 늘 주장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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