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YWCA회장 논설위원

올 가을맞이는 요란하다. 태풍을 연거푸 세 번이나 때려 맞고, 북쪽에서는 미사일을 높게 쏘아 올리고, 돼지들을 무더기로 살 처분해야하는 가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광장은 두 개로 쪼개져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냅다 질러댔다.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다. 

조국 법무장관이 지난 14일 스스로 사퇴했다. 지난달 9일 취임한 지 35일 만이다. 눈만 뜨면 조국이었다. 하루도 조국 뉴스로 도배되지 않은 날이 없고, 어디서 누굴 만나도 조국 얘기뿐이었다. 다른 이슈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광장을 통한 다양한 의견 표출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비폭력 평화적 시위는 성숙한 우리 문화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분열된 광장은 몹시 위험한 양상으로 흘렀다. 두 진영으로 쪼개진 광장은 더이상 성숙한 민주주의의 '아고라'가 아니었다. 혼란과 혼돈의 '아수라장'이었다. 이 사태를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교묘한 정치행위가 작동하면서 광장을 정쟁과 진영 간 대결의 장으로 몰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라가 두 쪽이 났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은 적폐고 우리는 혁명이다" 사유의 깊이와 다양성의 작가라 알고 있는 공지영 작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극단적 글이다. 광화문 광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졸지에 적폐세력으로 몰아놓으면서 편을 갈랐다.

"조폭들끼리 서초동 단합대회를 해 본들 마지막 발악일 뿐" 제1야당의 홍준표 전 대표가 내 던진 말이다. 서초동 광장에 발붙인 사람들을 조폭 똘마니로 전락시키면서 지지세력을 부추겼다.
양 진영의 지도층들은 독설과 궤변으로 편을 가르고, 자기편 주장은 진실이고 국민의 뜻이고, 반대편 주장은 가짜뉴스라고 선동했다. 내 편, 네 편 노골적인 편 가르기 속에 확증편향은 굳어만 갔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들었다.

도긴 개긴. 이 싸움이 진정 우리사회를 위한 진검승부가 아니라 위선과 위악의 대리전으로 느껴져서 눈감아 버리지만, 못내 아쉬운 점은 조국 논란을 통해 교육 불평등과 계급-계층 사다리 같은 근원적 문제들이 모처럼 드러났는데, 이를 조국 찬반의 회오리로 가려 버렸다는 점이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계급갈등' '계층갈등'이다. 정의와 개혁을 외쳤던, 그래서 정의로울 것이라 믿었던 그의 삶이 알고 보니 다른 강남 상류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중산층과 서민이 느끼는 배신감과 박탈감이 그 핵심이다.

특정 사회계층에 속한 이들이 갖가지 혜택을 누릴 때, 더 많은 누군가는 그런 혜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들만의 성채는 높은 담장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진짜 스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고등학생도 논문을 쓴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 속에 선명하게 드러난 'SKY캐슬'을 봤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갖고, 없는 자는 갈수록 빈곤할 수밖에 없는 구조,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최악의 분배 속에서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가고 있다.

지난 9월 30일 전국 교수-연구자-대학원생들은 "촛불항쟁의 정신을 되살려 전면적 사회대개혁에 나서자"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구조적 불평등과 소수 특권집단이 구축한 '캐슬'의 교육적-문화적 특권과 차별, 이로 인한 광범위한 박탈감과 환멸이 근본적 문제임을 직시하자"고 촉구했다. 

성명서가 강조하는 요구는 "전방위적의 경제 개혁, 노동 개혁, 교육 개혁"이다. 그러나 정치권도 언론도 이 목소리를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영 대결 속에 묻혀버린 외침이다. 

지금이라도 직시해야 한다. '계급'과 '계층'의 판도라 상자는 활짝 열렸다. 이를 마주해 진검승부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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