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사유 사물과 풍경 36. 삶의 각질을 벗겨내는 밟기의 하루

사람들은 자갈밟기를 통해 아픈 부위가 어딘지에 따라 몸의 안 좋은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게된다.

자갈 밟기는 짜릿한 쾌감을 준다. 굳은살에 침을 논 것처럼 발바닥이 간지럽다가 내장기관을 콕콕 찌르는 듯 아프다. 아픈 부위가 어디냐에 따라 몸의 안 좋은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발바닥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 그냥 걷기로 한다. 두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한 것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먹은 게 무엇이며 한 짓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멀쩡하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 한 분이 "일주일 정도 걸으면 괜찮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온몸을 비틀며 걸어오는 내가 위태로웠나보다. "정말요?"라고 응수해보지만 내일 또 걸을 수 있을까 싶다. 누구 말마따나 묵힌 게 많으면 많을수록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사람이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자신의 감정, 생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치나 마찬가지다. 몸을 느끼게 되면서 내 마음도 훨씬 더 돌아보게 된다. 내가 모르고 있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말이다.

피부의 각질을 벗기기는 쉽다. 혈을 자극하면 피부 속 세포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밖으로 나오려 하면 죽은 각질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침을 놓거나 자갈 밟기를 하면 간지러운 이유가 그 때문이다. 피가 돌고 세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신호인 것이다. 몸의 변화는 그래서 불치병이 아닌 이상 마음보다 몸의 변화가 훨씬 빠르다. 마음은 그에 비해 알아차림의 시간이 더딘 것 같다. 누가 아무리 일어줘도 내 감정이 동하지 않고, 생각의 변화를 일으킬만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여간 움쩍거리지 않는 것이다. 어찌 마음만 그러랴. 사회의 관습, 고정관념이 변하는 데도 엄청난 수혈 요구한다. 6. 25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를 훌쩍 넘겼는데도 반공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위기가 닥치면 그 사회의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데, 요즘의 정국이 딱 그 모양세다.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 사회에 어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의 난국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는 서로의 칼끝을 겨누고 있다. 더없이 용기가 필요한 시국이다. 쭈이야(영화 '아쉬람'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영화 '아쉬람'(디파 메타, 2010)을 보았다. 1938년, 인도의 바라나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아쉬람ashram은 원래 힌두교도들이 머물며 수행하는 사원을 말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과부들의 공동숙소이다. 1938년, 1938년 인도의 바라나시는 남편이 죽으면 남은 생을 속죄하며 '아쉬람'에서 살아야했다. 엄격한 교리를 따르는 이곳의 여인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여덟 살 쭈이야(사랄라 역)는 아버지가 아쉬람에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과부가 된 것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영화 '아쉬람'은 세상의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지와 광기 속에서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사진은 영화 '아쉬람'의 한 장면.

아쉬람에는 깔랴니리사 레이 역)(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과부가 되어 그것에 온 것이다. 쭈이야와 깔랴니는 서로 의지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고, 깔랴니가 귀족 청년 나랴얀(존 에이브러햄 역)과 사랑에 빠졌을 때도 심부름꾼이 되어준다. 사실 깔랴니는 매춘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신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깔랴니는 나라얀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운명이 있을 줄이야. 깔랴니가 매춘한 대상이 나라얀의 아버지일 줄은.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영화 '아쉬람'의 원래 제목은 '새벽'이다. 과거 인도의 여인들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진정한 여성해방, 자유의 새벽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과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다하더라도 제 감정과 제 생각을 제대로 표현만 할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어린 소녀 쭈이야는 얼떨결에 아쉬람에 갇히게 되어 절망과 무기력에 죽을 뻔했다. 하지만 쭈이야의 동심은 그로 하여금 천방지출 돌아다니게 하였고, 어른들의 어떤 말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깔랴니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의심하는 아쉬람 식구들에게 "결혼할 거예요. 결혼할 거예요." 반복하며 소리 지른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결국 깔랴니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지만 그 시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쭈이야는 아마도 여성해방을 위한 진리의 해법을 찾았을 것이다. 가만 있어서는 안된다, 싸워야만 된다는. 아마 쭈이야는 동굴에서 당당히 걸어 나와 간디의 뒤를 쫓으며 비폭력과 여성해방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을까. 인도의 여성 해방운동가 우샤 메타Usha Mehta 박사처럼 말이다. "신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신이다"는 대사가 아직도 명징하게 들린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내 삶의 두터운 각질들을 과감히 털어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자갈 밟기를 좀 더 해야겠다. 눈물 쏘옥 빠지도록. 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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