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기미년 백주년을 보내면서 당시의 절실했던 해방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염원을 다시 새기게 된다. 선교 역사 십년에 불과했던 제주의 교회와 신앙인들 중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이들이 있었다. 

조천에서 기미년 삼월, 21일 토요일부터 이어서 나흘 동안 시위가 벌어졌다. 이 저항의 선봉에 선 동지들은 14인으로 이들은 모두 옥고를 치렀다. 그중에 김연배가 있었는데, 당시 24세로, 신앙의 길에 들어선 초신자였다. 주일성수를 이유로 처음 이틀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후반부의 저항대열을 이끄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24일 화요일은 장날이어서 더 많은 주민들이 합세하였다. 

주동자들은 모두가 6개월 이상 1년까지 형을 확정받았다. 백응선이 가장 먼저 사망하였다. 나머지 동지들 13인은 미밋동산의 동지라는 뜻으로 동미회로 뭉치고 동지들의 이름으로 고인의 비를 세웠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출감하여, 김연배는 연말에 세례를 받았다. 민족의 아픔을 절실히 느끼면서 그는 신앙에 의지하여 이를 극복하려 애썼다. 1920년 10월에는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신앙에 헌신하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했다. 어린 딸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실의에 빠졌고, 결핵으로 인하여 1923년 11월 26일 2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귀덕에서 태어나 금성교회를 세운 조봉호는 제주가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독립투사다. 서울의 경신학교,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배우면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신앙을 형성하였다. 삼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아 송금한 일로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애국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국내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내의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조선독립희생회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운동이 일어났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이 일에 제주의 목회자들도 흔쾌히 협력했다. 교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범도민적 참여가 이루어졌다. 약 50일 동안 4,450여 인의 모금을 통해 1만원이라는 거금이 되어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이는 제주의 교회가 전적으로 협력하였고, 또한 이웃 주민들까지 이에 참여하도록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자금을 무사히 상해에 보낸 독립희생회는 적극 참여하기 위해 상해에 회원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이 이들을 검거했고, 지니고 있던 군자금 송금 영수증도 발각됐다. 조봉호를 비롯한 관련자 60여 인이 검속됐다. 조봉호는 이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동지들에게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시키도록 당부하고는 이 모든 일의 주모자가 자신이라 자처했다.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대구 형무소에서 1920년 4월 28일 38세의 나이로 조봉호는 순국했다. 사라봉 모충사에 그의 애국애족의 뜻을 현양하는 공적비가 우뚝 서 있다. 

한강 이남에서는 군산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치열하게 독립선언과 시위가 전개되었다. 제주의 학생들도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중문 출신 강규언과 강문호였다. 이들도 옥고를 치렀고, 평생 독립을 염원하고 활동하였다.  

금성의 이덕련 장로의 아들 이의종은 평북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졸업하였다. 삼일운동 당시 시위에 열렬히 참여하였는데,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일경에 의해서 체포, 희생되었으리라고 추정될 뿐이다. 광주 수피아 여학교의 학생 고연홍도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서울에서 시위를 주도한 조천 출신의 이화여고보 학생 김진현도 있었다. 

이들 중에 후손이 없거나, 보훈처가 직계가족을 찾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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