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문학평론가·수필가·논설위원

요즈음 마켓에 들리면 여러 종류의 막걸리를 선전하고 있다. 제품 선전원은 패트병에 든 막걸리를 종이컵에 부어 시음을 권하기도 한다. 막걸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곡물농사가 이루어진 시대에 빚어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맛있다'는 뜻인 미(美)와 지(旨)를 사용한 미온(美?), 지주(旨酒)라는 말과 막걸리와 단술을 의미하는 요례(曜醴)라는 말이 나온다. 

김홍도의 풍속화 '타작'은 가을걷이인 타작에 여념 없는 농부들의 우직한 모습과 달리 이를 바라보는 양반 앞에는 술병과 사발이 놓여 있다. 신발을 벗어 놓고 긴 담뱃대를 물고 한쪽 손바닥을 뒷머리에 괴고, 돗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농부들을 감시하는 듯한 그림이다.

막걸리의 기본재료는 멥쌀, 찹쌀, 전분 등의 곡물과 누룩 그리고 물이다. 항아리 안에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만든 고두밥과 누룩, 물이 함께 어우러져 담겨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불을 뒤집어쓴 항아리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 온다. 안을 들여다보면 술덧에 크고 작은 거품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누룩 속의 효모가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증거이다. 다 익은 술은 채주(採酒)하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대나무로 촘촘히 짠 용수를 술덧에 박아 떠낸 술이 청주(淸酒)다. 가라앉은 술지게미를 거른 것이 탁주이고, 탁주에 물을 첨가한 것이 막걸리이다. 요즘 양조장에서는 대부분 청주를 뜨지 않고 채주한 12~15도의 원주(原酒)에 물을 타서 도수를 6~8로도 맞추고 있다.

술은 적당히 즐기면 약이 된다. 과음을 되풀이하면 독이 되니 이(利)·해(害)의 양면성을 지닌다.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된다는 논리로 '약주'라고 했을 것이다. 

평생 선박 생활을 한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말이 선박 생활이지 강원도 묵호나 도계에서 석탄을 싣고 부산과 마산화력발전소에 오가는 일이었다. 집에 오면, 심심찮게 막걸리를 마시곤 하셨다. 가끔 술에 취해 담벼락에 얼굴이 부딪쳐 피가 흐르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금주하곤 하셨다. 그러다 서너 달이 지나면 또다시 막걸리를 마시고 얼굴에 상처를 만들어 집에 오곤 하셨다. 아버지 얼굴에 상처로 생긴 딱지가 왜 그리 보기 싫었던지, 막걸리가 왜 그리 싫었던지. 더군다나 마시면 속이 더부룩해지고 뒷맛이 깔끔치 않아 더욱더 가까이 안 했다.

올봄 우연히 유튜브에서 본 막걸리 제조법을 보고, 직접 만들어 보았다. 맛이 괜찮았다. 이후 서너 달에 한두 번 빈 김치병에 담그고 냉장고에 두고 마신다. 아무런 보존제나 착색제 없는 순수한 막걸리라 편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수천 년간 한반도 주인이었던 농민들이 마셨던 농주(農酒)인 막걸리를 천상병 시인은 밥 대신 마셨고, 생전의 아버지도 즐겨 마셨던 막걸리라 자식도 마신다. 이백(李白 당나라 시인, 701~762)의 술 사랑을 음미해 본다. 

천약불애주(天若不愛酒) 주성부재천(酒星不在天) 지약불애주(地若不愛酒) 지응무주천(地應無酒泉) 천지기애주(天地旣愛酒) 애주불괴천(愛酒不愧天).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하늘이 주성이 있을 리 없고,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땅에 어찌 주천이 있겠는가,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하였으니, 술 사랑이 어찌 부끄러우랴. (이백, 월하독작)

평소 높은 나무 꼭대기나 새들을 보기 위해 순간적으로 머리를 쳐들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되고 왼쪽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게 된다. 아버지도 술 마시고 달님을 쳐다보며 '오동추야. 달이 밝아…'를 부르다 담벼락에 부딪힌 게 아닐까.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 뵈면, 직접 만든 막걸리를 큰 사발에 대접하고 싶다. 그리고 아버지·어머니께 이승에서 알게 모르게 잘못했던 행동을 사과하며, 마른멸치와 김치를 안주로 막걸릿잔을 주고받으며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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