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수 미술평론가·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논설위원

한국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 기록

김환기의 작품 '우주'가 최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됐다. 한국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다. 앞선 그의 작품이 이룬 기록을 경신한 것이기도 하다. 100억 미만의 기록을 깨고 100억대를 넘어섰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이나 일본의 경쟁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체기에 빠진 한국미술계엔 대단한 자극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는 우리의 국력과 경제력에 비례하는 소망스러운 뉴스로서 우리들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이 작품은 감환기의 뉴욕시대 그의 주치의였던 김마태(마튜 김)부부 소장으로 뉴욕시대를 대표하는 전면 점화의 대작이다. 두 면으로 이루어진 화폭은 가로 세로 2m 50㎝로 두 면의 상단에 두 개의 거대한 달무리 모양의 무브망이 자리 잡으면서 전체가 그 특유의 점획으로 뒤덮여있다. 그의 전면 점화는 70년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어 작고하던 74년까지 이어졌다. 70년대 초반엔 획일적인 점화로 뒤덮였으나 72년부터 화면상에 면 구획과 무브망을 동반한 구성의 변화가 시도됐다. 청색이 주조이나 때로 적색과 황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작고하던 74년에 오면 약간 침울한 회색으로 변모돼 운명의 예감처럼 우울한 느낌이 지배된다.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

김환기는 63년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초대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하면서 이후 뉴욕에 정착했다. 그때부터 그의 화면은 서울시대의 화풍이 일신하면서 순수추상 세계로 진입됐다.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최초 추상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지만 해방 이후 산, 달, 항아리 등 구체적인 대상을 모티브로 한 반추상 경향을 오래도록 지속했다. 그러니까 뉴욕시대의 점화는 구체적인 모티브가 완전히 사라진 순수한 점과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추상 영역에 이른 것이다. 그의 뉴욕시대는 자신을 불사르는 집념에 넘치는 나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점화가 처음으로 국내에 알려진 것은 70년 '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 주최'에 출품해 대상을 수상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였다. 점화의 세계가 시작된 초기 작품이다. 혹자는 전면 점화가 아니었더라면 김환기는 미완의 작가로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최후를 장식한 이 시대 작업이 없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아쉬움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에서 60대로 막 진입했으니 어찌 보면 예술가로서 가장 성숙한 시기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뉴욕일기는 절박하면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점철됐다. 그가 찍어나간 점들 하나하나가 그리움의 표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 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이라고 했다.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에선 한 예술가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이 작품이 처음 전시된 것은 75년 13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특별초청 회고전이었다.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와는 인연이 깊다. 63년 7회 비엔날레 때는 명예상을 받았으며 65년 8회 때는 특별 개인전이 마련됐다. 그가 작고한 이듬해인 75년엔 특별 회고전이 열렸다. '우주'는 이때 출품된 50점 중 하나였다. 

비평가 마르코 버코비치는 '아트 뉴스'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번 비엔날레 최우수 작가는 나의 의견으로는 한국의 김환기라고 생각한다. 작고했다 할지라도 대상은 마땅히 그에게 해당되었어야 했다. 그의 작품은 위대한 창조의 힘이 막 고동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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