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듬다…느리게 뜨거워지고 오래 가는 마음을 나누는 일
혼자 보다는 여럿, 다름과 차이·조화 배우는 민속지식의 힘

"쓰다듬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좀 그렇다'는 뜻이다. 말로 다할 수 없어 그냥 쓰다듬을 뿐이다. 말을 해도 고작 입속말로 웅얼웅얼하는 것이다. 밥상 둘레에 앉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가난한 아버지의 손길 같은 것, 으리으리하지는 않지만 조그맣고 작은 넓이로 둘러싸는 것, 차마 잘라 말할 수 없는 것, 그런 일을 쓰다듬는 일이라고 부르고 싶다" (문태준 '느림보 마음' 중)

'어떻게 살아야'하는 무거운 질문에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라고 답하는 시인의 글을 다시 찾았다. 늘 이 맘 때면 손이 가는 책에서 이 부분에는 '느린 열애'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저 쓰다듬는 것으로 한 가슴을 불태울 수 있을까. 더듬어 생각해보니 굳이 한 줌 재로 흩어질 지경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뜨거웠고 뜨거울 줄 알았다. 시인의 귀띔처럼 '정갈하고 따듯한' 것들이 우리를 살게 했다.

# 김'장'을 하고 된'장'을 담그고

찬바람이 훅하고 어깨를 치고 저절로 움츠러드는 시기가 되면 꺼내는 것들이 있다. '1년을 준비하는' 지혜와 정성이 가득한, 느린 열애의 중심에 있는 '장'이다. 타 지역과 달리 제주는 12월 들어서야 김'장' 계획을 짜고 또 장을 담글 준비를 한다. 상대적으로 따숩은 날씨도 있지만 신과 사람의 경계가 모호했던 까닭에 애써 손 없는 날을 골라 그랬다. 전통적으로 섣달그믐을 선호했다.

김장의 '장'과 된장의 '장'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장에서는 보관하다(藏)는 해석을, 된장의 장(醬)은 숙성해 담근 것들을 통틀어 설명하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3000년이 넘는 김장 역사의 효시가 배추 염장이라고 본다면 애써 구분하기도 그렇다. 사실 그보다는 '정(情)'이란 뜻으로 풀어 설명하고 싶은 심정이다.

누군가를 위해 꽤 오래고 손이 가는 준비를 하고 '쓰다듬는'과정을 거친다. 혼자 보다는 여럿이 힘을 보탠다. 적어도 몇 마디 사는 얘기를 듣고 속엣것을 풀어낸다. 나눠 먹는 것도 좋지만 어우러져 새 맛을 내는 것들에서 배운다. 이런 정이라 손품이 많이 가는 불편을 덜어내고 간편한 것들을 찾아내면서도 사라지기는커녕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애쓴다.

# 손 안가는 부분 없는 수고의 결과

'쓰다듬는다'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배추 등을 정성껏 다듬고 소금물에 절여 또 헹구고,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은 것들에 꼼꼼히 김치속을 넣는다. 손이 안 가는 부분이 없다.

좋은 콩을 골라 적당히 삶아 으깨 메주를 만들고, 여기에 곰팡이를 입힌 뒤 소금물에 담궜다가 장을 가르고 숙성하는 긴 시간 역시 손을 빌려한다.'

겨우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김장을 담그면 다음 햇배추가 나올 때까지는 보관해 먹었다. 제대로 장맛을 내기 위해서는 최소 1년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한 해 만큼의 정성과 지혜를 담아 한 해 이상의 것을 전한다. 요즘 기준으로는 느려도 한참 느리지만 서서히 뜨거워진 것의 온기는 오래 간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엄격함 대신 차이와 다름, 조화를 이해하는 지혜도 품고 있다. 

어떤 재료들을 섞느냐에 따라 각 지역 그리고 각 집마다의 손맛을 결정한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쓴다. 같은 콩에서 시작했어도 햇간장은 주로 맑은 장국에, 묵은 진간장은 무침이나 조림에 쓴다. 묵은 된장으로는 된장찌개, 햇 된장은 쌈장으로 만들어 음식의 맛을 더한다. 심지어 김치와 장류가 만난 장김치도 있다.

# '어떻게 살아야'의 답

다시 '어떻게 살아야'라는 질문은 던진다. 이번에는 거울을 보듯 스스로에게 묻는다. 역시나 아직 꺼낼 답이 없다. 생각해 보니 질문이 잘못됐다. '어떻게'는 각자의 기준보다 조금 높거나 엄격한 기준을 의미한다. 마음 쓰는 것이 각자 다를 진데 생각에 꼭 맞춘 답이 나올리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엄격해도, 그렇다고 너무 너그러워도 답을 구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조언도 솔직히 진부하다. 아니 정 없다. 그러니 이 겨울 '정'을 담그자. 고생을 사서 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 의미를 살피자는 것은 '같이 살자'는 다른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우룩 가슴 한 켠이 시린 참이다. 이런 속이 빤한 핑계는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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