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필 제주YWCA회장·논설위원

화제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2016년 출간되어 누적 130만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국문학으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소설로 나왔을 때부터 논란이 벌어지더니 영화로 나와서도 결론 없는 논란은 여전하다. 꺼내놓기 민감하고 불편한 현실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은 30대 경력단절여성의 이야기다. 한 평범한 여자가 살면서 겪는 먼지 같은 차별의 실상을 그렸다. 김지영은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유능한 직장인이었으며, 재능과 꿈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꿈은 결혼, 출산과 함께 산산이 부서진다.  

영화는 1982년생 김지영의 과거 경험과 현재의 삶은 가부장제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여 왔는지, 지금 어떻게 살아 움직이면서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지를 보여준다. 자랄 때부터 남아 선호사상에 의해 차별을 받고, 직장에서는 진급에서 차별을 받는다. 어쩌다 한가로이 아이를 보며 커피를 마시면 '맘충'이라 불린다. 재취업의 기회를 만들어 보지만 육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좌절한다.

"많이 힘들겠다"라고 공감해 주면 좋으련만 영화가 나오기도 전부터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를 막아주세요" 라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 "살뜰한 남편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 배부르고 등 따시니까 호강에 겨웠다"는 등 반발과 비판의 댓글이 쏟아지고, 심지어 소설이나 영화를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부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비난과 혐오마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이 비판해야 할 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가부장제, 성차별주의, 남성주의"라고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남성들이 적으로 삼아야 할 대상도 여성이 아니다. 여성 인권이 진일보하는 것은 결코 남성 인권의 후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여성이 해방되면 남성의 속박도 함께 풀린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분법적 성역할은 여전하다. 우리나라는 30~40대 여성고용률은 OECD국가 중 최하위, 성별 임금격차는 주요 국가들 중 가장 크고,  한국 남성들의 가사분담률은 16.5%노동시간이 100시간이면 16시간 30분만 남성이 책임지고 있다. OECD국가 중 최하위이다. '육아휴직기간의 소득 대체율은 육아휴직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23개 OECD 회원국 중 18위이다. 경제생활에서의 통계지표가 위와 같을진데, 전반적인 영역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가족생활에서의 수치와 지표는 통계조차 없으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텅빈 눈동자로 "괜찮다"고 하지만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82년생 김지영. 영화속 주인공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많은 걸 꿈꾸고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았던 여성이 출산과 육아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나면서 더 이상 막힌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느끼는 절망과 한계가 만들어내는 증상. 이 땅의 많은 젊은 여성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병이다. 

김지영의 할머니 세대는 여성의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갈등조차 없었다. 어머니 세대는 여성 차별이 부당하다고 인지하였지만 참고 살 수 있는 토양이었다. 그 시절은 현모양처라는 타이틀로 그나마 위안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밀레니얼 세대인 김지영들은 다르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이 사회적 성취와 자아실현을 보상해 준다는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의 의식은 이들보다도 진일보 되어가고 있다. 

급격한 저 출산·고령화와 저성장 시대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여성의 경쟁력은 필요하다. 함께 돌보고 서로 존중하는 양성평등사회가 된다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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