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 봉성교회 목사·논설위원

1950년 함경도에 진격했던 유엔군은 12월에 철수해야만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이미 평양과 원산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10만 장병의 무사귀환이 지상명령이었다.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열흘 동안 철수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더불어 10만명의 민간 한국인들이 공산치하를 탈출할 수 있었다. 본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장진호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고 물러선 미 해병 제1사단의 장비는 11일에 선적하기 시작하여 14일에 완료하였다. 15일에 출항하기 시작하여, 유엔군과 국군 제1군단이 차례로 철수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600만 톤에 달하는 장비를 수송해야 했다. 피난민을 배려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통역을 위하여 10군단에 배속된 고문관 현봉학은 알몬드 장군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는 의사로서 미국 리치몬드에서 연수과정을 밟았다. 전쟁이 나자 자원 입대했는데, 영어소통능력이 뛰어나 통역사로 일하도록 배치되었다. 마침 알몬드의 고향이 리치몬드여서, 고향 친구처럼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현봉학은 고향을 버리고 공산치하를 탈출하려는 민간인들을 수송해 줄 것을 설득하였다. 결과, 많은 민간인들이 군함에 동승하여 남쪽으로 올 수 있었다.  

현봉학은 마지막으로 타고 있던 상선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에게 피난민 승선을 허락하도록 애원하였다. 7,600톤의 배에 14,000명이 승선하여, 23일 출발하였다. 이는 가장 많은 인원을 구명한 민간 상선으로 역대 기록이 되었다. 해상에서 태어난 다섯 아이들에게는 임시로 김치 1, 2,..5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라루 선장은 감동적인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남은 생을 수도자로 살았다. 

마지막 피난선 LST 온양호는 24일 오전 늦게 무사히 출항하여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오후에는 남겨진 폭약과 무기, 유류품을 파괴하는 폭격이 이루어졌다.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괴한 것이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피난민들에게 그러한 정보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아픈 기억으로 남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나에게 처음 들려준 사람도 흥남철수 마지막 순간에 승선한 피난민의 자녀라고 했다. 배가 해안에서 약간 거리를 두게 되자, 도시는 무참히 폭격 당하였다고 한다. 일부 가족이 아직 그쪽에 있던 피난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부모는 평생, 그 폭격이 주체가 미군이라는 말은 하지 못하면서도, 그 광경을 가슴 아프게 술회하였다고 한다.   

 철수 기간 내내 흥남 외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포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두 폭격은 철수가 완료된 시점에 시행되었다. 마지막 배 온양호에 승선한 피난민들만이 현장에서 이 일을 목도했다. 아니면, 나중에 다른 피난민의 이야기를 고향의 소식으로 듣고서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섞이거나 꼬인 기억 혹은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모의 월남을 이야기할 때에 매러디스 빅토리호에 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자서전에서는 LST라고 기록하였다. 모친 고 강한옥 여사의 증언에 흥남부두의 폭격을 목전에서 봤다고 하니 후자가 더 맞을 듯하다. 

미군 혹은 유엔군이 맞닥뜨린 한반도의 상황은, 지금 분쟁에 시달리는 어느 후진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피난민 속에 섞여 있는 적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흥남 지역으로 몰려드는 피난민들에게는 적의 정규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동시에 적지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민간인들은, 여기에 섞이지 않도록 선을 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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